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밀과참 Sep 07. 2023

인간극장, 일상이 모여 삶이 되는 힘

  우리 집 시커먼 텔레비전이 선명한 생동을 표출하는 날은 두 경우에 한정되어 있다. 아빠가 여유로운 , 우리 가족이 어쩌다 좌상(座床)을 펼치는 특식의 날. 후자의 경우 리모컨의 작동권은 내게 쥐어진다. 권리보다는 의무에 가깝다. 원래 잡다한 일은 집단의 꼬두바리가 도맡지 않는가. 채널을 쭉 살피곤 <유퀴즈 온 더 블럭>이 안 보이면 메뉴 중 다시 보기로 들어간다. 갈래는 또다시 두 방향으로 나뉜다. KBS→시사 교양→<인간극장>이거나, SBS→예능→<동물농장>이다.


  <유퀴즈 온 더 블럭>은 가족 모두가 보고 싶어 하고, <동물농장>은 부모님과 내가 애정하며, <인간극장>은 나의 최애 프로그램이다. 동시에 막내로서 내미는 비장 카드이기도 하다. '다시 보기'나, <인간극장>은 평일 아침 방영되는 특성상 5부로 쪼개져 있다. 다른 두 방송은 한 편이 끝나기 전에 밥을 다 먹는데, <인간극장>은 밥 먹는 도중에 1부 끝까지 볼 수 있다. 급 톤이 높아진 내레이션 특유의 엔딩곡이 울려 퍼지면 2부 궁금해지고, 2부 끝나면 3부도 보고 싶어지고, 끝내는 5부를 한 자리에서 다 보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다시 보기 기능으로 시청하는 거라 끊어 봐도 상관은 없다. 이는 중독의 문제다.


  '영상물 중독' 정도는 네 사람 중 내가 가장 얕다. 5분만 보고 다 로 미루어도 개의치 않다. 그 때문에 다음 화를 궁금해하는 건 열혈팬인 내가 아니라 가족들이다. 밥을 다 먹는 순간 나는 할 일을 시작한다. 가족들은 뒷얘기를 봐야겠다며 텔레비전 앞에 남아 있는다. "칠칠이 네가 틀어놓고 너는 왜 안 봐!" 소리도 듣는다. '나보다도 가족들이 보길 바라니까요' 속내밝히지 않는다.




  <인간극장>은 초가 쌓여 분이 되고, 분이 쌓여 시가 되며, 시가 쌓여 하루가 되고, 하루가 모여 나날을 이루는 우리네 일상을 그리고 있다. 평범과 특별 고루 버무려져 있다. 출연진들마다 개성은 있어도, "일상을 어떻게 보내는가"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변함 없는 주요점.


  나는 아빠가 텔레비전을 장시간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빠가 텔레비전 애호가면, 엄마와 언니는 휴대폰 애호가다. OTT 유튜브를 꾸준히 들어가니, 셋 모두는 영상 시청이 취미이기도 하다. <더글로리>가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었을 때 나와 언니, 엄마 셋이 번갈아 가면서 각자 시청하였는데 내가 가장 더디게 보았다. 최근 화제인 <마스크걸>의 경우 언니 이미 다 봤고, 엄마는 궁금해하는 단계다. 아빠는 아무 채널이나 보지만 때때로 비명 소리에 칼소리에 총소리 까지 들려온다. 영상이 핵심 콘텐츠로 자리한 때에 '영상 시청'을 금할 수는 없다. 대신 지나친 자극 반복해 보지 말고, 때로는 풀기도 했으면 좋. 자극적이지 않은 데다가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인간극장>을 틀어버리는 이유다. 같은 중독이어도 건강하고 배움 있는 중독 아닌가. 피 철철 흐르고 사람이 사람 죽이는 일 없이 웃음과 눈물 넘치는 장면. 이를 통해 일희일비(一喜一悲)가 반복되는 게 우리네 일상이니 悲에 집중하지 말고, 그렇다고 喜만을 취하지도 말라는 진리를 '가족'과 실감하고 싶다.


  <인간극장>의 힘은 이 매거진의 취지와도 일맥상통한다. 역사가 긴 프로그램과 나란히 두는 깡다구가 지나쳐 보이기도 하나 팬으로서 잔말도 늘여보겠다. <인간극장> 내에서 무기를 쥔 자는 없다. 재력, 지위, 평판, 연줄은 결코 힘으로 거론되지 않는다. 출연진들이 이러한 요소 중 하나 이상을 지녔다 할지언정 출연진도, 제작진도 내세우지 않는다. <인간극장>이 추구하는 건 '삶의 표상'이지, '삶의 비교'가 아니어서다. 나도 그렇다. 을 쓰며 우리 가족을 다른 가족과 비교하지도, 다른 가족을 또 다른 가족과 견주지도 않을 거다. 가정 내 일어난 슬픔(悲)을 감추며 기쁨(喜)만 논할 생각도 없다. 거창한 명목 없이 그저 가정의 면면을 기록하고 싶다.




  처음에는 브런치 활동을 몰래 하였지만 한 달 하고도 반이 지나니 자연스레 누설하게 되었다. 아빠, 엄마, 언니, 멍멍이는 내가 우리 가족에 대한 글 쓰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가족 얘기해서 뭐 하냐"는 회의적인 반응이 없어서 놀랐다. "대체 무슨 내용을 쓰는 거야?" 궁금해할 뿐이다. 동의를 얻고 난 후에도, 가족 매거진 날마연재하기 어렵다. <인간극장> 월화수목금 5일 방영되나 촬영 기간은 한 달이 족히 된다고 들었다. 담아내는 피사체가 특정 개인이 아니라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이들의 이어서 그럴 거다. 방영되지 못한 시간과, 글로 남기지 못한 일상. 방영된 순간과 글로 새겨진 나날은 동일한 무게를 지니고 있다. '방영'과 '글'은 또 다른 파생물일 뿐이고 온 시간이 합쳐져야만 삶을 이룩할 수 있으니 격차를 둬서안 된다.


  근래 고민이 잦았다. 억으로 남은 내용과, 공개적인 공간에 써낼 수 있는 얘기를 따져 보고 있었다. 그러다 '자극'을 우선으로 두려는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다. 자극이라는 이름의 고비는 우리 가족 모두 나눠 갖고 있으나 당장의 일주일만 보아도 고비는 딱히 지 않았다. 그렇 하여 고비가 과거이고, 평지가 현재인 것도 아니다. 그러니 과거 현재, 고비평지 구분 짓지 말고 전체적인 모습만 바라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인간극장> 삶의 교과서 삼아 자랐고, 현재도 가족 몰래 타버리는 비타민찾고 있다. 가족과의 불화가 깊은 시기 마음을 달래던 내 안식처, 어느덧 가족 함께 보프로가  되었다. 다만 바뀌어서 나는 5부까지 다 보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방에서 우리 가족을 글로 남길 동안, 텔레비전 앞에서 가족들이 보는 게 <인간극장>이 된다. 그것만으로도  재밌고도 기쁘다.


  한낮엔 30도를 찍으며 아침이라고 봐주는 법도 없는 근래의 날씨. 여전히 여름 같은데 동물들은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린 건지 이상 행동을 보입니다. 친구네 고양이는 털 달린 켄넬에 들어간다는데, 저희 집 강아지는 햇빛을 찾아 베란다에 발라당 누워 버립니다. / 오늘의 일상입니다.

  개인적으로 자주 돌려본 <인간극장> 편도 남겨 둡니다. ㅎㅎ 유튜브에서 시청 가능하세요. 삶의 포착에 사사로운 평가는 먼지와도 같습니다. <인간극장>을 보다 만끽할 수 있는 꿀팁은 그 어떤 장면도 '평가'하지 않는 겁니다. 모든 출연진들과 우리네 일상 속 사람들을 힘껏 응원합시다!

매거진의 이전글 할머니! 김치 냉장고가 떠났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