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게 망고를 먹여야지

두서없는 아빠 이야기 (2)

by 밀과참

우리 집에서 아빠만이 과일을 좋아한다. 나머지 구성원은 <있으면 먹는데 없어도 된다>는 주의다. 근래 들어 매해 사계절 꼬박 과일을 먹고 있는데 아빠와 살지 않던 학창 시절에는 이러지 않았다. 보통은 제삿날에 과일을 먹었고, 제철 과일은 급식에서나 맛봤다. 엄마는 음식에 돈을 아끼지 않았지만 두 딸은 하고 많은 과일을 제치고 '방울토마토'만을 좋아했다. 원래 뭐든 먹어본 사람만이 맛을 구별할 수 있는 법이다. 급식에 나오는 과일들은 맛이 있지도, 없지도 않은 평범한 당도였다. 그런 까닭에 마트 가서도 과일에 시선이 가지는 않았다. 그러다 자칭 당도 감별사인 아빠로부터 과일을 받아먹으니 "이야, 맛있다!" 감탄할 수 있었다. 하나 멀리 한 세월이 길어 아빠처럼 홀릭이 되지는 않고 있다.


지난 주말, 일 끝나고 돌아온 아빠는 '후렌치 파이' 딸기 맛의 작은 상자를 들고 왔다. 오는 길에 차 안에서 해치운 게 분명했다. 운전하는 사람이 후렌치 파이라니, 아빠가 차 안의 청결도에 얼마나 신경을 안 쓰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쓰레기라도 버리는 걸 감지덕지로 여기며 바라보았는데 식탁에 후렌치 파이 두 개를 올려놓고 나머지(상자+비닐)를 버렸다. "아예 다 먹고 오지 그랬냐!"는 엄마의 말에, "칠칠이 위해서 두 개 남겨 온 거야. 먹고 싶어서 혼났어~" 토로했다. 아빠는 이처럼 그냥 과일도 좋아하고 과일 맛 디저트에도 환장한다.


민초 VS 반민초라는 극강의 호불호보다도 우리 집에서 우선인 사항은 과일 VS 노과일이다. 아빠 혼자 아이스크림 골라오는 날이면 원성을 듣기 십상이다. 단 걸 안 좋아하는 엄마는 누가바와 요맘때만 먹는다. 언니는 토마토마(최애) 아니면 옥동자 같은 초코가 적당히 가미된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 아빠는 과일 함량이 가장 높은 따옴과 델몬트 시리즈를 사랑한다. 구성원들의 기호를 꿰뚫는 쫄따구인 내게 시키면 될 일인데 아빠 혼자 언질도 없이 다녀와서 문제다. 골고루 사 오기는 하나 과일맛은 아빠만 먹으니 과일 20+기타 아이스크림 80 비율이 적당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아빠는 과일 50+기타 50으로 담는 바람에 과일맛 아이스크림(들)은 우리 집 냉동고에 가장 오래 남게 된다. (아빠는 주말에만 머무니 사 와도 먹을 일이 적다.)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망고' 같다. 아빠에게 물어봐서 얻은 답변은 아니다. 내 관찰 결과다. 고등학생 때는 아빠와 단둘이 카페에 갈 일이 잦았다. 아빠는 주기적으로 나를 보러 오는데 밥 먹고 나면 할 일이 없어서였다. 가끔은 영화도 봤으나 평일 기준 주어진 시간은 2시간에서 3시간 정도라 영화를 보기는 애매했다. 밥 먹고 곧장 헤어질 때도 있었고, 카페에 가서 남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럴 때 아빠가 고르는 건 높은 확률로 '망고'가 들어가는 음료였다. 오히려 요즘 들어 카페 갈 일이 드문데, 가장 최근에 아빠가 시킨 음료도 '망고 코코넛 스무디'였다. 올여름에는 가족끼리 빙수를 자주 먹었다. 보통은 구성원이 다 맛있게 먹을 맛으로 고르는데 딱 한 번은 망고 빙수를 주문해 봤다. 이날 아빠는 누구보다 맛있게 먹는 눈치였고 가장 오래 숟가락을 붙들고 있었다.


과일만 이런 건 아니다. 한 집에서 같이 살지 않은 세월 탓인지 우리 가족은 입맛이 맞지 않는다. 날 때부터 현재까지 엄마 곁에 찰싹 붙어 있는 내겐 엄마 음식이 가장 맛있다. 엄마도 내가 해주는 음식을 좋아한다. 언니는 19살부터 타지 생활을 시작하여 플렉스로 저지르는 비싼 음식과 배달 음식을 선호한다. 아빠는 언니보다 더 이른 나이에 독립했는데 아직까지 요리 실력이 꽝인 걸 보면 생존형으로 먹는다. 내가 해준 음식, 엄마표 음식, 배달 음식, 비싼 음식, 아빠가 한 망한 음식 모조리 가리는 법 없이 흡입하고 본다. 생일을 비롯해 때마다 특정 구성원만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날도 있다. 싫어하는 음식이 없는 아빠는 예외인 줄 알았으나 의도치 않게 '망고 빙수'가 특식이 된 모양이다.


그렇다고 망고 빙수를 또 먹으려 하면 아빠는 "오레오 놔두고 왜 망고 먹어?"라며 미심쩍어할 게 분명하다. 아빠는 당신이 좋아하는 과일을 집에 사다두기는 해도, 토마토 먹고 싶다는 딸들에게 딸기를 들이밀지는 않는다. "토마토랑 딸기 둘 다 먹어~"가 아빠의 기조다. 토마토 먼저 동나면 아쉬워하다가도 다시 토마토를 사다 줄 위인이다. 아빠 입에는 토마토도 맛있고 딸기도 맛있으니 둘 다 먹으라는 건 이해가 간다. 아빠 성의에 딸기도 먹는다. 그런데 아빠는 우리가 들이미는 음식은 맛보려고 하질 않는다. 언니가 서울에서 공수해 온 케이크든, 내가 대전에서 업어 온 타르트든 "안 먹어" 고개를 젓는다. 아빠는 단 걸 좋아하고 밥 대신 빵도 먹으면서 우리가 사 온 것에 한해서만 고집을 부리는 게다!




아빠와 외식하면서도 기분이 꽁기한 상황은 발생한다. 덮밥 전문점에 가서 돈가스 덮밥과 소고기 덮밥을 각자 고른다면 따로 먹어도 상관없다. 그런데 레스토랑에 가서 스테이크와 파스타, 필라프를 시킬 경우 아빠는 필라프만 먹는다. 주문 전에 아빠에게 메뉴를 고르라고 하나 "필라프 중에 어떤 필라프 시킬지 아빠가 골라 줘"가 내 의도지, "아빠는 필라프 먹어, 나는 나머지 먹을게"가 아니다. 올여름 속초로 여행 가서는 물회와 섭국과 대게 비빔밥을 주문하였다. 아빠가 콕 집어 고른 건 대게 비빔밥이었고 나와 언니는 세 음식 다, 함께 먹을 생각에 앞접시에 덜려고 했다. 그런데도 아빠는 대게 비빔밥만 먹었다. 다른 것 좀 먹어 보라 해도 됐다고 하더니, 다 먹고 나서야 "비빔밥은 별로네"라고 하였다.


"아빠, 나눠 먹자" 하면 아빠는 덮밥 위에 올라간 돈가스를 덜어 준다. 그런데 내 덮밥 위 소고기는 가져가지 않는다. "소고기 덮밥 맛있다!"라고 말하면 궁금할 법도 한데, "어, 많이 먹어" 하고 아빠는 돈가스 덮밥만 공략한다. "소고기 덮밥이 맛이 없네"라고 말하면 아빠는 당신의 돈가스 덮밥과 바꿔주려고 한다. 빙수를 망고와 오레오 둘 다 시켰으면 아빠는 분명 망고만 먹었을 테다. 망고를 좋아하면서도 우리가 오레오 맛없다고 하면 오레오 빙수만을 홀로 해치웠을 이고. 아빠 귀가 전에 모녀 먼저 밥 먹는 건 되지만, 엄마 퇴근 전에 딸이 먼저 밥 먹는 건 빠 기준에서 허용되지 않는다. 아빠 혼자 밥 먹는 건 아무렇지 않아 하면서, 내가 혼자 밥 먹고 있다고 하면 "아빠가 갈까?" 안쓰러워한다.


아빠가 좋아하는 과일과 아이스크림을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아빠의 요상한 행위를 받아들인 것도 최근이다. 이럴 때마다 아빠와 떨어져 지낸 공백이, 단순히 공백으로 지나간 게 아니라 얕고도 깊게 영향을 미쳤음을 실감한다. 또 어떤 요소를 눈치채고, 어떤 일로 부딪칠지는 알 수 없다. 아빠의 몰랐던 점을 알게 되는 건 기쁜 일이다. 아빠와 문제가 생긴다 해도 나는 20대이고 아빠도 중년이 되었으니 어른 대 어른으로 스무스하게 넘길 수 있을 테다. 어릴 때의 나는 아빠 손을 곧잘 놓쳤다. 아빠가 이해되지 않는다면서 상처도 많이 주었다. 이제는 아빠가 도망치려 해도 내가 아빠만큼이나 달리기가 빨라졌으니 따라잡을 수 있을 다. 아빠를 끌고 '고망고'란 망고 전문 카페에 가봐야겠다. 온갖 망고 메뉴에 아빠의 눈이 돌아갈지 확인해 보고 싶다.


아빠가 카톡으로 패스트푸드점 기프티콘을 보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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