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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Sep 22. 2023

어찌 됐든 유지만 하자

[ㅠ] 유지
겉보기엔 변함없지만 속은 단단해지는 중


"너네가 이렇게 오래 만날 줄 몰랐어"라고 들었을 때, 부정할 새 없이 공감하게 되더라. 함께 다니기에는 성향이 안 맞는다고 생각했었으니 말이야. 날이 갈수록 우리 다 비슷비슷해지고 있는 거 같지 않니? 우연이 인연으로 발전하려면 인(因)을 어떤 식으로 짜 맞추는지가 관건이겠지. 둘이서도 어려운데 우린 셋이서 맞춰 왔으니 더 대단한 거라고 자찬해 보자. 미래는 알아서 만들어가야겠지만 각자의 미래에 셋을 뭉탱이로 넣어두길 부탁하고 싶다. 뭐 사 줄 생각 말고 자리할 수나 있게 해 줘.


  졸업은 친구가 평범한 동창으로 하락하는 기단처럼 보였다. 초등학교 친구들은 중학생이 되자 연락이 끊겼고, 중학교 친구들도 고등학교에 가니 볼 일이 없어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또 새로운 사람들로만 인간망을 짜게 되리라 여겼다. 이처럼 대하는 법을 몰라서 기한을 늘여가려는 친구들에겐 서운함을 안기기도 하였다. 중3 때 친구가 생일날 고등학교 정문에서 기다린 적이 있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데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특정 프로그램으로 알게 된 타지 친구한테서 날 보러 버스 탔다는 연락이 왔다. 친구를 데리러 터미널에 가는 내내 텁텁한 감정을 느꼈고 헤어질 때까지 이를 없애지 못한 불찰에 친구의 기분도 썩 좋지 못했으리라.


  만남이 싫은 건 아니었다. '굳이?'라고 생각했다. 목적이 '나'인 게 이해되지 않았다. 우연히 마주쳤다면 반가워했겠지만 시간을 들여 먼 길을 달려온 이유가 단지 '나'라는 게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굳이?'라는 반문은 두 상황에서만 튀어나온 것도 아니었다. 학교에서 매일 보는 친구들을 굳이 밖에서도 만날 필요가 있는지 의아했다. 극소수의 예외가 있긴 했으나 "재밌었어, 잘 지내"라고 손 흔들면 끝날 사이들이라 생각했다.  


  고등학교는 전학을 빼면 3년 내내 학급 구성원이 바뀌질 않았다. 자연스레 추억이 배로 쌓였다. "무척 재밌었어, 부디 잘 지내"라며 인사말에도 한층 더 정을 더하려 했다. 하나 고등학교 친구들에겐 내 인사가 통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들은 "잘 지내다가 또 보자?"라고 힘줘서 말할 성격이었다. 물음표는 반강제의 뜻이었고 졸업 후에도 불려 나갔다. 스무 살 초반에는 불편한 마음으로 착석했지만 어라리요,  不이 떨어져 나가면서 점점 편해지기 시작했다. "아, 나가기 싫다...."라는 불평이 "아, 헤어지기 싫다...."는 미련으로 뒤바뀌었다. 이내 "또 보자?"라고 말하는 건 내가 되어 있었다.


  결국은 쭉 이어지지 못했다. 각자의 형편 때문이었다. 스무 살에 코로나가 발발하며 다들 본가에 머물렀으나 진즉 자취방을 계약한 탓에 떠난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수업이 대면으로 전환되면서는 더욱 만나기 힘들어졌다. 우리의 시간표는 같을 수 없었고 일상을 채울 또 다른 사람들이 친구들 곁에 나타났다. 빈 시간에는 알바, 봉사, 스터디, 대외 활동 등으로 바빠 보였다. 은근한 서운함이 훼방꾼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내가 속한 그룹은 열한 명이었는데 무리의 구분은 별 의미 없었다. 다른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으며 열한 명이 단체로 이동하기는 실상 불가능하였다. 대개의 시간은 晴와 炫, 두 친구와 붙어 다녔다. 특히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엔 교내를 빙빙 돌며 산책하는 게 필수 일과였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귀찮지도 않은지 틈만 나면 화단 주위를 걷거나 구름다리(* 건물과 건물이 이어지는 구간) 비스무리한 데서 속닥속닥 얘기를 나누었다.


  예비 소집일날, 晴과 강당에서 나란히 앉게 되어 인사한 게 첫 단추였다. 晴은 먼저 다가가는 성격이 못 되는데 금방 새 친구(나)를 사귄 데에 힘을 얻곤 炫에게도 말 걸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얼렁뚱땅 새 학기의 시작을 함께 끊었으나 초반부터 잡음이 발생하였다. 난 <다툰 사람과 더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의인데 이걸 깨트린 사람으론 晴이 유일무이하다.


  둘과는 가장 가까운 사이는 맞았다마는 졸업 전까지 감정이 상하는 순간들은 은근히 발생했다. 모교라는 공통분모를 벗어나자 오히려 돈독해진 특이 케이스다.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와중에도 晴과 炫의 만남이 꾸준할 수 있었던 건 상대에게 맞추려는 성향 때문이었다. 한 사람이 말 꺼내면 내빼는 법 없이 시간을 쪼개서 얼굴을 봤다. 晴은 고등학교 졸업 후 타지로 이사하였는데 시외버스 기준 40~50분가량이 소요됐다. 炫의 동네도 우리 집에서 40분은 시내버스 타고 가야 했다. 거주지가 제각각이라 '동네 친구'가 되긴 힘들었지만 서로의 동네에서도 보았다. 이동하는 데 드는 시간보다 친구가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걸 우선으로 뒀기에 가능했다. 번갈아 가며 장소를 정하니 이동하기 귀찮다고 내색하는 이도 없었다. 나는 이런 성향이 아니었는데 둘과 어울릴수록 물들어 갔다. 익숙해지자 나보다 바쁜 두 사람에게 내가 맞추고 싶어 졌고 이러한 태도가 대학 내 관계에서도 좋은 영향을 끼쳤다.




  올봄 晴은 교환 학생으로 타국에 갔다. 晴이 출국하기 전에 세 사람이서 1박 2일로 국내 여행을 떠났다. 내가 여행을 불편해하여 둘은 강요하지 않았지만 둘 다 원하는 일이기에 한 번 떠나보기로 했다. 晴이 가고 나선 아무래도 炫과 둘만 보게 되었는데 향수를 느낄 晴을 위해 틈틈이 줌을 하였다. 몇 주 전엔 炫도 떠났다. 해외여행 좋아하는 두 사람은 직접 거주도 하고 싶은가 보다.... 한동안 그리워할 각오를 하던 중 가장 최근의 줌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晴과 炫은 1년짜리 학생 비자가 만료되어도 연장하여 거주할 모양인 듯하다. 셋 중 나만 역마살이 없나 보다.


  고등학교 친구들로 인해 '친구'란 정의를 새로 쓴 건 맞다. 다만 엄청 가까워졌다가도 불현듯 멀어지는 현상에 심적으로 지쳤다. 졸업처럼 헤어질 대비를 할 기점도 지난 마당에, 언제부터 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는지 파악도 안 됐다. 입학 때부터, 친구의 정의가 바뀌어 가는 시기를 거쳐, 현시점까지 계속해서 만난 건 晴과 炫 두 사람이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절감하였다. 두 사람이 지내는 국가가 운 좋게도 같다 보니 나만 비행기 타면 그만이다. 둘은 내 사정을 아니까 놀러 오라고 강권하진 않는다. 晴은 "솔직히 힘든 일이잖아" 말해주고, 炫은 "연락 끊길 일 없어. 내 성격 몰라?!"라며 안심시켜 준다. 내가 바라는 건 우리가 여태까지 해 온 유지다. 더 가까워지고자 애쓸 필요 없이 +와 -는 오차 범위 내에서 이어졌으면 좋겠다. 둘에게만큼은 오차 범위가 관대하기도 하다.


  초등학생 때부터 SNS에 내 얼굴 올린 적 없는데, 그리운 나머지 셋이 찍은 사진을 카톡 배경 사진으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도 따라 올리며 우리 사이를 티 내고 있다. 친구들은 내 고집에 자꾸만 변화를 준다. 사람 바꾸는 건 어려운 일이라는데 우리는 서로를 위해 얕고도 길게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들이 관계를 유지하는 동력이라 믿는다. 다가오는 주말에는 셋이서 줌으로 만날 예정이다. 두 사람이 얼마나 나아가고 있는지 들으며 박수 칠 시간이다.


네가 준 집게 하고 비행기 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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