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 세탁소(수선집)에선 의도를 요구하다 보니 발걸음에 온갖 생각이 뒤따라 붙어요. '우연한 방문'은 있을 수 없는 가게가 유일한 단골집이라는 것도 특별하게 여겨집니다. 이역만리에서 왔던, 전국 팔도를 빙빙 돌았던 풍문은 상관없는데, 我 세탁소를 경유한 옷들이 유독 애착이 가긴 하네요. 사장님의 고유한 매력이 수선을 마친 옷들에 자연스레 배이나 봐요. 제 패션의 완성은 我 세탁소 명품손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은 아직도 와닿지 않는다. 일본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코>에선 사람의 마음에 모순된 감정이 있다고 지적한다. 타인의 불행에 동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사람이 불행을 어찌해서 끊어낼 수 있게 되면 왠지 불만스러워진다. 조금 과장하여 다시 한번 똑같은 불행에 빠트리고 싶다는 기분마저 든다는 것이다. 뛰어난 단편 소설임에는 이견이 없으나 이 대목이 특히 칭송받기에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원수도 아닌 사촌에게 배알이 꼴린다? 동정 대상자가 불행에서 안 빠져나왔으면 좋겠다?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그런 심보를 지니는 건지 당최 이해가 안 된다. 동정에는 무게가 뒤따른다.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게 아니라 강 건너 불구경식으로 있을 거면 어설픈 감정일 뿐이다. '기분' 파악조차 어려운 게 타인인데 단편적인 정보만 갖고 '개인'을 가엾이 여긴다는 건 얼마나 우스운가. 동정에 익숙해지면 도취에 빠질 수도 있다. 상대의 처지 대신 그를 불쌍히 여기는 자신의 마음에 스스로 감동받는 거다. 정 쓰고 싶으면 풍자나 비꼴 때 '척'만 하는 용으로 내미는 게 자신에게도 이로워 보인다.
남들과는 울음도 나누고 싶고 웃음을 함께 하면 더 좋다. 자주 쓰는 이모티콘 중 '궁디팡팡'이 있다. 한 캐릭터가 다른 캐릭터의 궁딩이를 톡톡도 아니고 팡팡 두드리는 일러스트다. 이건 하늘같이 높은 엄마에게도 쓰고 지인들한테도 마구 날려 댄다. 보통은 "수고했슈~"나 "완전 멋있다잉!!!"을 덧붙인다. 그도 아니면 깜찍한 행동을 향한 감탄사로 써먹는다. 성장 소설의 주인공이 나아가는 것도 따봉감인데, 아는 이가 발전하고 있으면 쌍따봉도 부족하다. 나이 불문 대단한 이들은 참 많으나 내가 본 힘은 총량의 10%도 미치지 않으리라.
내 인생에 한해선 주인공이 '나'겠지만 이 인물은 어째 관심이 가질 않는다. 좋게 말하면 수더분하고 나쁘게 말하면 건조한 성향은 '나'에 한해서만 발발한다. 매번 남들의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을 파악하게 된다. 믿음이 부족한 것도 있고 애당초 궁금하지 않은 것도 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 집에서 내 역할은 싸움꾼 옆 '관찰자'라 말해 왔는데 이게 굳혀지고 말았나 보다. 관람석에서 울고 웃는 게 더 마음 편하다. 최근에 발표하던 중, 내가 말하는 사람이 아닌 기분이 들어 당황했다. 머릿속 대본 읊기를 수행하기보다는 저쪽에서 듣고만 있는 느낌이었다.
선택할 순간이 오면 입이 잠시 다물어진다.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괜찮아서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내게 괜찮다는 건 뭐든 문제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약속을 정할 때면 시간, 날짜, 장소 등 모조리 타인의 뜻에 따르는 편이다. 하나 오로지 홀로 이겨내야 할 영역이 있으니... 옷차림이다. 교복과 작별하며 사복을 얼른 구비해야 했던 스무 살 초반에는 사이즈도 아리송하고 무엇이 필요한지도 몰라서 막막했다. 내 몸에 맞는 옷을 직접 고르는 과정은, 돈은 물론 시간까지 버리는 것만 같아 짜증 났다. 그런데 어느덧 취향이라는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유튜브 쇼츠처럼 짧은 영상이 대세이기 전에 취향이 완성되어 다행이다. 줏대 없는 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패션 BEST 3', '키작녀 패션 꿀팁', '한물간 스타일링', '옷 이런 식으로 입지 마세요' 같은 영상을 보면서 깔끔한 모나미룩(* 상의는 흰색, 하의는 검은색)만 입어야겠다고 다짐했을 테다. 10대를 그리 입고 다닌 게 멋쩍을 만큼 모나미룩은 나와 안 맞는다. 밝은 색일수록 어울리고 무늬가 있어야 만족스럽다. 2022년은 호랑이띠였다. 호랑이 패턴의 셔츠를 기념으로 입었다가 "야쿠자냐?" 소리 들었다. "더 기막힌 거 들려줄까? 집에 하의도 있다" 말하니까 반응이 난리였다. 이때는 마스크를 착용할 때라 멋대로 입어도 꺼릴 게 없긴 했다. 마스크가 해제되고 나선 인격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화려함의 정도를 조절하고 있다. 어찌 됐든 난잡한 패턴이든 쨍한 색이든 "근데 잘 어울린단 말이지…." 의아가 뒤따라오니 다... 다행인 건가? 시선이 따가운 날엔 "대학생 때 입지, 언제 또 이렇게 입어~!" 방패막을 친다.
세컨핸드 의류 a.k.a. 구제옷을 즐기는 수준이 아니라 매일 입는다. 교복을 입지 못해 절망하던 스무 살 때는 구제옷이 저렴하여 사보았는데, 요란법석한 취향이 정립되고 나자 보물찾기 시간이 되었다. 구제옷이 빈티지나 세컨핸드라는 명칭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나 꺼려하는 반응도 꾸준하다. 그 때문에 "넌 옷 어디서 사?" 물어보면 당황도 했다. 옷에 귀신이 들러붙었다는 둥, 세탁이 가능한 얼룩을 보고 혈흔이라는 둥, 그냥 더럽다는 둥… 같은 수군수군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MZ 세대치곤 줏대 없는 나 대신 다른 MZ들이 나서준다. 동일한 디자인을 구하기 힘들다는 희소가치성, 우후죽순의 보세와 다른 튼튼한 질, 합리적인 가격(* 수요에 따라 점점 비싸지고 있긴 함), 무엇보다 환경을 위한 선택이 가장 크게 대두되니 "빈티지샵. 구제야, 구제" 아무렇지 않게 인정할 수 있다.
치명적인 단점으로는 사이즈 맞추기가 힘들다! 어깨선, 가슴 폭, 기장 다 짧은 근래 여성 의류도 문제지만 구제 의류도 벌마다 차이가 크다. 그리하여 수선을 겸하는 집 앞 我 세탁소를 주기적으로 방문하게 됐다. 기장이 어중간해 밑단을 잘라내거나, 늘어난 고무줄을 쪼이거나, 과한 어깨 패드를 빼내는 게 시작이었다. 취향이 선명해질수록 요구 사항은 다양해졌다. 이미 만들어진 옷이어도 의도에 따라 변화가 가능해서였다. 소매가 너무 짧은 원피스는 민소매로 만들어 겹쳐 입는다. 넥라인이 답답하면 브이넥으로 바꾼다. 어깨선이 안 맞는 상의는 어깨가 약간 드러나게 잘라내면 더 나아 보인다. 심부름으로 패딩과 코트만 맡기던 어느 집 딸내미가 요상한 옷을 한 아름 들고 와 부탁드리니 사장님은 이런저런 칭찬을 하셨다. 我 세탁소의 특징으론 '요구르트'가 있다. 맡길 때 하나, 찾을 때 또 하나, 직접 꺼내마시면 된다. 사장님은 요구르트도 하나 더 챙겨주시곤 가격도 깎아주신다. 생전 처음 받은 단골 대우에 마음이 찡했다. 수선비가 합리적이어도 티끌 또한 모이면 태산이 되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팩트도 들었다. 사장님 호의에 단골 자격을 고수하고 싶어 굴하지 않고 수선할 게 생기면 찾아갔다.
어릴 적에는 사장님이 무섭기도 하였다. 어느 날, 나보다 언니일 학생들이 치마 기장을 짧게 줄여달라며 찾아왔다. "나는 그런 거 안 해준다"라고 단호히 일축하시는 사장님 포스에 놀랐다. 동시에 화난 언니들에게 시비 털리지 않도록 숨을 죽였다. 사장님은 달인 + 장인이시다. 보통은 이틀 내에 휘리릭 해주시는데 어느 날은 일주일 가까이 연락이 오지 않아서 잊으신 줄 알고 방문하였다. 애매한 재단선을 어떻게 해야 깔끔해질지 내내 고민 중이었다고 사과하셨다. 누락된 게 아니니 아무 때나 해주셔도 괜찮았는데 '유레카'를 겪으셨나 보다. 다음 날 연락이 왔고, 뿌듯해하시는 사장님께 연신 감사 인사를 드렸다.
세컨핸드 의류를 리폼까지 하는 상점들이 늘고 있다. 이름난 브랜드뿐 아니라 보통의 옷도 리폼을 거치면 가격대가 확 올라간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장세권(장인이 있는 권역)' 거주자가 아닐까 싶다. 개성과 수선은 알과 닭의 관계 같다. 개성이 있으니 수선을 맡기는 건지, 수선을 맡겨서 개성 있게 되는 건지. 근래는 한 푼이든 두 푼이든 마냥 자책을 안겨서 수선집 걸음을 잠시 끊고 있다. 곧 사회인이 되면 좀 더 간결하게 입어야 되겠지만 단정함에도 리폼을 가미할 순 있겠지. 한 옷을 오래 입기보다는 한 옷을 다양한 방식으로 입으려는 게 내 의도다. 의도를 실현시키려면 我 세탁소를 찾아가야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