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보다도 몸이 놀랐나 보다. 해가 짱짱할 때는 왼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오른팔로 쇼핑백을 들고 다녔다. 왼쪽만 혹사시키는 거 같아 깜깜해지고 나선 오른쪽 어깨에 가방, 왼팔에 쇼핑백으로 교체했다. 내 딴에는 공평한 줄 알았던 작업이 오른팔 근육을 날뛰게 만들었다. 무엇이 오른팔을 이리 화나게 만든 걸까. 알통에서부터 손목까지 길게도 성질부린다.
배낭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부터가 처음 '혼여'인 내겐 생경한 불편함이었다. 몇 달 전, 방구석을 떠날 일이 잦을 줄 알고 패드를 구매했다. 호기와 반대로 되도록 집에 머물며 손에 익은 고물 노트북만 찾게 됐다. 숙소에서 홀로 버틸 밤이 온종일보다 길게 다가올 것만 같은 예감에 노트북 대용으로 패드를 챙겼다. 내겐 노트북, 패드 모두 타자용이다. 독수리 터치 권법(패드)일 바엔 10년 차 천지인 키보드(스마트폰)를 택하는 게 낫다. 초등학교에서 한컴 타자로 논 짬밥이 새겨져 있어서다. 컴퓨터 자판기가 천지인 키보드보다 몇 배는 빠르기에 알뜰살뜰 블루투스 키보드도 챙겨 왔건만!!! 이놈이 없으면 패드에게 애정을 줄 수 없는데 책임감은 어디로 날려 보낸 건지 수명을 다하였다. 왜 하필 여행 첫날, 그것도 고객센터 상담 서비스가 끝난 시간대에 유난인지 탄식이 나왔다. 상담받는다고 나가버린 시스템이 돌아오는 건 아니지만 전문가가 수리 대상이라 땅땅 결론지으면 "제발, 제발"거리며 혼자 낑낑 매달리진 않았을 테다. 나와 패드의 징검다리는 블루투스 자판기였기에 난데없는 사직에 패드와 정드는 것도 당연 물 건너갔다. 근육통과 키보드 고장만이 '혼여 사고'는 아니었다.
하루 내내 총체적 난관: 출입구, 횡단보도 방향, 왼쪽 오른쪽. 즉 길치 체질 / 대응은 가능했던 고난: 배터리 부족 / 본가로의 순간 이동이 절실하던 때: 뫼비우스 구간. 이리 나눌 수 있다. 앞서 거론한 두 상황은 세 부류의 위기 대응 미션에 비하면 그나마 낫다. 적어도 '숙소'라는 실내 공간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타고난 길치여서 지도 어플을 달고 산다. 본가이자 주 활동 반경인 우리 지역에서 헤매는 시간은 5분~10분 정도이다. 길치인 걸 감안하며 일찍 나오기에 지연은 별다른 타격을 미치지도 않는다. 이렇듯 지도 어플이 든든한 아군인 줄 알았건만 감추어 있던 찐 아군은 익숙한 기억임을 깨달았다. 우리 지역 A구에 있는 ㄱ 식당에 간다고 했을 때, 식당은 첫 방문이더라도 A구는 내게 낯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부산광역시에서 이름만 아는 '구'로는 해운대구밖에 없다. 어디를 향하든 낯설기만 하다는 건 탐험가에겐 여행의 묘미일 텐데 우물이 익숙한 개구리에겐 공포와 불안을 자아냈다. 회전하는 미로에 빠진 거 같았다.
부산역에서부터 출입구로 애먹었다. 환승 구간인 서면역엔 볼거리가 많다기에 일찍 도착했겠다, 시간을 죽이려다가 나만 죽사발 되었다. 오르막길 내리막길 헉헉 움직였다. 아무리 평일이라 해도 그렇지 사람이 이리 없다는 건 내가 묘한 골목을 택했음을 확신시켜 주었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에도 가게는 있어서 지도 보며 간신히 골인한 거지만 그 유명한 '전포 거리'에 해당하는 곳들 위주로 갔다면 배터리가 10% 되진 않았을 거다. 휴대폰 기종이 구식이다 보니 배터리 숫자가 하향 곡선을 가파르게 타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완충하고도 10프로로 귀가한 적도 많은데 100프로였다가 이렇게 금방 10프로 찍기는 처음이라 "어...?"에서 "어?!?!?!" 당황하며 지하철역으로 달렸다. 10에서 5가 자전거 속도라면 5에서 전원 종료는 오토바이 속도다. 목적지인 신세계 센텀시티점까지는 5에 도달하면 안 됐다. 여기는 물품 보관소가 4시간 동안 무료라기에 먼저 향했다. 영화 시작이 체크인 시간과 동일하여 숙소에 짐을 둘 순 없었다. '얼리체크인' '레이트체크아웃'이라는 용어도 처음 들었다. 당연 추가 비용이 붙는데 시간당 지하철 보관함보다 3배 비싸다. 신세계 백화점의 깊은 아량은 여행객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한 눈치다. 하나 요즘은 궁금한 키워드(신세계 센텀시티점 물품 보관) 검색하면 맨위에 요약 혹은 정보글이 떡하니 뜨지 않는가. 맨 첫 번째 글 눌렀다가 보관함은 고사하고 배터리 5프로 찍고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 22년 글에선 지하 1층 '자주' 근처에 물품 보관함이 있다고 알려준다. * 23년 글에선 물품 보관함이 지하 2층으로 이전했다고 정정해 준다. * 층마다 안내 기기가 있으니 그걸로도 위치 파악은 가능하다.
물품 보관함은 한층 아래에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삥삥 돌았다. 스태프 전용까지 지나쳐야 하나, 매장을 가로지르면 숨은 공간이 나오나 의심했다. 보조배터리를 깜빡해서 이리된 게 아니다. 충전기 꽂은 채 폰 만지면 휴대폰에 좋지 않다고들 말하지만 내 폰은 아예 숫자 올라갈 생각을 안 한다. 보조배터리 믿고 발등 찍힌 경험이 있기에 콘센트 있는 카페로 가서 잠시 휴대폰 혼자 놔두려 했다. 배터리 하나로 나락 직전을 맛봤는데 역시 경험해야 발굴하는 것도 있다.
* 지하 2층 여자 화장실엔 콘센트가 있는데 큰 단점으로는 세면대 벽면이라 사람들과 부딪친다. * 지하 3층 물품 보관함에도 콘센트가 있으며 미미한 단점으론 바닥과 가까워서 휴대폰을 맨바닥에 두어야 한다. 이런 정보도 필요한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실수를 반복할 이다음의 내가 고려 대상이니 기억날 때 남겨 두려 한다.
10월 5일 순걸음수는 2만 3천보를 기록하였다. 버스 1시간, 기차 2시간, 지하철 40~60분 등 교통 수단을 알차게 이용한지라 이동거리에 비하면 높다고 생각 안 했는데 토스 만보기 기능에서 상위 1%라고 알려주었다. 23년 토박이에 더해 23년 뚜벅이 내공도 있어서 오른팔이 저 혼자 찡찡거릴 동안 두 다리(무릎)는 멀쩡... 아닌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긴 힘든 걸 안다. 그러나 토끼를 잡으려던 내 손엔 토끼풀만이 남아서 회의감도 들었다. <배우 보려고(만) GV 간다>는 건 <2% 포인트 적립 위해 5만 원 쓴다>와 유사한 도출 같다. 나름 C열 정중앙을 선빵했지만 여기서도 얼굴은 콩알만큼 보였다. 무대가 멀어 A열과 B열 분들도 몸을 내밀게 되니 단차가 있음에도 시야가 불편했다. 고해상도 폰을 쓰시는 분이 앞열에 계실 경우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내 건 당연 고해상도가 아닌데 시력보단 휴대폰 카메라가 낫겠어서 줌 해서 보려고도 했다. 이걸 직접 경험이라 할 수 있는 건지..... CGV 센텀시티점에서 가장 큰 상영관이기도 하고 조명이 생각보다 어두워서 형상이 흐릿해진 것도 있다. 출연진분들 실물 후기는 없다... 안 내놓는 게 아니라 정말 없다...!
영화관은 해운대구(센텀시티역)이고 숙소는 수영구(광안리)에 위치해 있다. 예약 전 지도에 검색했을 때 도보 40분 정도라 괜찮다고 여겼다. 직진보다 좌회전 우회전 구간을 합친 게 더 길지 않나 싶을 만큼 이리 꺾고 저리 꺾느라 지도에서 눈을 못 뗐다. 관람 후 낭만 있게 걸어오려던 건, 내 눈에 들어오는 배우님들 인상만큼이나 희뿌연 환상이었다. ‘수영강’이라는 데만 나왔고 바다는 숙소와 가까우나 다른 방향에 있었다. 광안역에서 내리고도 한참 걸어가야 하며, 버스도 환승 아니면 배차 간격이 넓다고 떠서 고민도 않고 도보행을 택한 건데 직접 걸어 보니 대중교통이 애매할 수밖에 없는 코스였다. 사람 몸도 힘들 길이었고.
집에서는 오전 6시 반경에 나왔다. 숙소에 입성한 오후 7시 반경까지 12시간 하고도 1시간 동안 목적지를 찾고 찾고 또 찾고... 지도에 뜨는 화살표만 보고 보고 또 보았다. 운동화 벗고 휴대폰과도 떨어지자 진한 회의감이 싸악 밀려왔다. 숙소 엘리베이터 탈 때부터 "오늘 하루 정말 별로다"가 아니라 "오늘 하루 뭐지?" 벙쪘다. 혼자 하는 여행이 처음이니 상상 폭이 좁아진 모양인데 그 얄팍한 상상조차 싹 다 어긋나자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전자기기들 먼저 밥 먹이면서도 정작 끼니를 못 챙긴 나는 가만히 있었다. 불안하면 식욕도 못 느끼는 편이라 여행 묘미인 미식 또한 못 즐겼다. 이러다간 자정 넘도록 손발 다 안 움직일 것만 같아서 울적함을 데리곤 밖에 나왔다. (1) 네 컷 사진 찍기 (2) 음료 테이크아웃 하기 (3) 마시면서 바닷가 걷기. 차례로 밟자 "지금 타지에 있구나. 광안리는 내게 처음이구나" 실감이 스멀스멀 들려 했다. 키보드용 건전지 사러 편의점에도 들렀다. 음료는 잠을 못 자게 했고 키보드는 건전지 문제도 아니라 짐까지 더해졌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다. 카페 알바생분과 편의점 직원분이 극도로 친절하셨던 데다 긍정 기운을 심어주는 이들 덕에 회복하려고 애쓸 수 있었다. 몸은 혼자인데 정신과 마음엔 어쩔 수 없이 타인들(가족들, 친구들, 브런치 작가님들 ㅎㅎ)이 자리하니 이를 '혼여'라 부를 수 있을지!
+ 2일 차 영화표는 취소했습니다. 계획대로 다녀봤으니 오늘은 예정을 비우고 즉흥적으로 움직여보려고요! 1순위 목적이던 <거래> GV는 뜻깊었습니다. 전날 경험하지 못한 분이 표를 잡으셨길 바라며 저는 다른 즐거움을 찾으러 나가겠습니다. 행복한 금요일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