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궤도에 더 이상의 학교는 없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끼어들려는 대학 때문에 미치는 줄 알았다. 여름방학이 끝난 8월의 어느 날부터, 대학 합격 발표가 난 12월의 어느 날까지의 과정은 제목에 적은 그대로 '고군분투' 자체였다. 손윗 형제가 대학을 진학하지 않은 데다, 부모님도 입시 시스템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기에 가족들 중 도움을 줄 만한 이는 없었다.
성적이 좋은 편이 아닌 데다가 수능 공부를 하고 있지 않았기에 내게 남은 선택은 수시 중에서도 학생부생활전형뿐이었다.
1. 어느 대학을 쓸 것인가?
정보를 수집해 봤는데 시간이 턱도 없이 부족해 담임 선생님의 의견을 따랐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못하니 국립대 위주로 냈다. 면접이 없는 사립대 한 군데, 거점국립대 세 군데, 국립대 두 군데에 도전했다. 고등학교 2년 반의 성적이 국립대에 지원하기에는 낮았으므로 성적보다 학교생활을 우선으로 보는 모 사립대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야 했다.
2. 어떻게 해야 갈 수 있는가?
자기소개서와 학생생활기록부를 제출하고 1차(서류) 합격하길 기다려야 한다. 합격할 경우 2차로 면접을 준비해야 한다. 면접은 앞서 제출한 두 서류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나, 몇몇 학교에서는 제시문 면접이라 하여 시사 관련 질문을 갖고 토론 비슷하게 면접을 진행한다.
지금은 자기소개서의 질문과 글자수가 수정된 걸로 알고 있다. 내가 고3일 당시에는 아래 네 문항으로 문항별마다 보통 1,000자에서 1,500자를 요구했다.
공통질문 첫 번째: 학업에 기울인 노력과 학습 경험을 통해 배우고 느낀 점.
공통질문 두 번째: 의미를 두고 노력했던 교내활동(3개 이내)을 통해 배우고 느낀 점.
공통질문 세 번째: 배려, 나눔, 협력, 갈등관리 등을 실천한 사례를 들고 그 과정을 통해 배우고 느낀 점.
네 번째 질문은 학교마다 차이가 있었는데 지원동기와 학업계획, 더 나아가서는 진로계획을 묻는 데가 많았다. 학과 말고 학부 단위던 학교에서는 이 모집단위를 택한 이유도 요구했다.
소수과에 지원했다 보니 뽑는 인원은 많지 않았다. 학부 단위의 모 학교는 전국에서 17명을 뽑았다. 이는 후한 편이었다. 다른 학교들의 경우 4명만을 뽑았다. 4명은 최종 합격수이니 좀 더 넓혀 보자면 1차 합격으로는 16명을 뽑은 것이다. 4:1의 경쟁률을 뚫고 면접에서 좋은 인상을 주어야만 최종 합격이 가능했다.
즉, 학생부 전형의 경우 소위 자소서를 위한 '글빨'과 면접을 위한 '말빨'이 중요하다. 여기에 더해 평가자들이 '이 학생'의 앞날이 기대된다고 여길 만한 특징까지 있어야 한다.
누누이 말했듯 대학 합격은 내게 있어서 기쁜 일이 아니었다. 졸업 직전까지 친구들에게 합격 사실을 알리지 않을 만큼 입 밖에 꺼내고 싶지도 않았다. 부모님에게도 말씀하시지 말라 부탁드려, 친척들은 내가 입시에 실패한 줄 아셨다고. 그 정도로 합격 사실 자체가 싫었다.
그런데도 내 대학 합격이 의의를 지니는 건 학생은 공부만이 살 길이라 생각하는 이들에게 반격을 던졌다는 점이다.
학교마다 매해 '입결'이라는 통계가 뜬다. 통계가 뜨면 재학 중인 학생들은 이번 신입생들 큰일 났네, 이 과는 양심이 없네 등 품평질 하기 바쁘다. 이러한 통계에서 내 성적은 찾아보기 힘들 만큼 성적만으로는 해당 대학의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그렇기에 1차 합격도 신기하기만 했는데 면접을 주고받으면서 평가자(이하 교수님)들이 왜 내 얘기를 들으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지원한 데는 어문학과였다. 파파고를 돌려 외워간 외국어 자기소개(학생 공통)는 망했는데 자기소개가 별 타격을 미치지 못할 만큼 나머지 질문들은 언어와 관련이 없었다. 교수님들은 나와 독서를 연관 지어 주목하셨다. 말로 하려니 길어져 정리하자면,
1. 공부는 못해도 책은 꾸준히 읽었다. 그 때문에 학생부 독서란이 빼곡했다.
2. 당시 소설 장르만 편식하였고 특정 나라의 현대 소설을 주야장천 읽은 게 생기부에 드러났다.
(독서 편식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생각하나 대학 입시에 있어서는 뜻밖의 도움이 된다고 본다...^^)
3. 입시 미술을 관두며 꿈도 잃었다. 아는 거라곤 소설밖에 없어서 자소서에도 소설을 끼어 넣었다.
교수님들께 받은 책 관련 질문을 종합해 보자면,
1. 현대 문학 중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이 있는지
2. 왜 매력을 느꼈는지
3. 현대 문학 말고 고전 문학도 읽은 게 있는지
4. 해당 나라와 우리나라 간의 문학 교류가 어떻게 가능하다고 보는지
솔직히 말해 면접은 그냥도 아니고 매우 재밌었다. 끔찍했던 입시에서 면접만큼은 좋은 기억으로 남을 정도로, 교수님들과의 10분에서 15분 간의 대화는 긴장되어 떨리면서도 설렜다. 혼자 책만 읽다가 해당 분야의 전문가일 분들 앞에서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기회가 신선했다.
교수님들은 '성적'과 관련된 질문은 일절 안 하셨다.
인터넷에선, 특정 과목의 성적이 낮은 경우 면접에서 지적당할 수 있다는 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공부를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라는 해명을 어찌 조리 있게 하나 고민을 꽤나 했건만 교수님들은 편차가 심한 내 성적을 안 좋게 보시는 대신, 전공과 관련지어 나를 파악하려 드셨다.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