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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Jul 24. 2023

잠만보 아빠에게 씁니다

  주름 관리, 똥배 관리는 못해도 아빠의 얼굴에선 젊었을 적의 인상이 겹쳐져. 1998년 결혼식 때부터 둘째 자식이 대학을 벗어난 2023년까지, 별 차이 없는 모태 동안 엄마와 달리 아빠의 주름살은 왜 이리 많은지. 엄마와 나는 탄식하기 바빠. 아, 언제 저렇게 늙었을까? 이 사람이 아빠야, 할아버지야~


  아무리 생각해도 생일날 쓴 편지를 읽지도 않고 방치한 건 너무했어. 아빠가 안 열어보는 그 봉투, 나 또한 열어보지 않을 거야. 수신자가 거부한 이상 그 편지는 평생 봉쇄되는 거야! 어디 아빠에게 서운한 일이 이거 하나뿐이겠어. 그래도 참을 수밖에. 아빠는 나의 아빠이고 너무 빨리 늙어가는 게 미치게도 슬프니까.


  엄마는 내 편지가 진심인지 의심하고, 아빠는 내 편지를 읽어 줄 생각도 안 하고. 그래서 수신자가 정해져 있지만, 수신자에게 닿지 않을 편지를 써 볼까 해. 누구들은 부모 사랑이 자식 사랑은 결코 못 이긴다고 하던데, 엄마아빠가 생각하기에도 그래? 습....  우리 부모님은 표현을 못 하는 거라고 생각할게. 우리 식구 중에서 홀로 눈물 많은, 별난 둘째 딸이 받아들여야지 뭐.




  하기 계절학기 성적은 한참 전에 나왔어. 아빠가 좋아하는 에이쁠을 사수하며 최종 학기가 마무리 됐어. 시험에서 해방된 건 참 좋은데 아빠에게 칭찬받을 유일한 거리가 없어져 버렸네. 오히려 잘 된 일이야. 성적 뜰 때마다 당사자는 하나도, 말 그대로 하나도! 기쁘지 않으면서 아빠에게 칭찬받겠다고 슥 보여주는 거 참 우습다고 생각했어. 그러니 앞으로는 나 자신이 기뻐할 만한 뜻깊은 일을 쟁취했을 때, 아빠에게 공유하도록 할게.


  어렸을 때부터 칭찬에는 늘 목말라 있었던 거 같아. 촌철살인 던져보자면 아빠는 우리 곁에 없었으니까 내 결핍도 몰랐지?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어. 엄마는 종종 지인들의 자식 얘기에 부러워할 때가 많았으니 아빠의 속내도 그럴 거라 의심했어. 부모님 바람 들어주는 게 뭐 그리 어렵겠나 싶은 마음으로 대학까지 진학했다가 아주 호되게 당했지. 결국은 내가 선택한 일인데 목적이 내가 아니라 엄마아빠였다는 이유로 참 오래도 탓했어. 지금도 너무 화날 때면 탓하긴 해. 그래도 내 선택이었다는 자각은 있으니 좀 나아졌지?


  백수로 지내는 것도 쉽지 않네. 그나마 대학생일 때는 우리 부모님이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일들이 종종 생겼는데, 백수에게도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그토록 바라던 자유인데 잘 만끽하지 못하고 있어. 당장 오늘 새벽에도 심히 불안했어. 잠만보 아빠가 대자로 뻗어 잘 동안 머리를 싸맸단 말이야! 이대로 살아도 되나, 수입은 있게 알바라도 구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도 아니면 아빠가 그토록 원하는 대학원을 준비해야 하나.




  그러다 아침에 눈 뜨고 싹 잊었어. 우리 사랑스러운 멍멍이가 날 깨워줬어. 비가 내리는 줄도 모르고 같이 햇빛 쐬겠다며 개수레 번쩍 안고 1층까지 내려갔다가 무척 당황했지. 어리둥절한 강아지 얼싸매고 개수레 다시 갖다 둔 후 비 맞으면서 산책했어. 밤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 그 나무에게 어떤 특별한 일이 생긴 건지, 특정 나무 밑에만 나뭇잎이 가득 떨어져 있는 거 있지. 그걸 밟으며 강아지와 킬킬댔어.


  돌아와서는 필사하다가, 점심으로 양배추 참치 덮밥 해 먹었는데 양배추가 글쎄 상태가 너무 안 좋은 거야. 그래서 남은 양배추 모조리 채 썰어 놨어. 그러곤 다시 필사하다가 멍멍이 밥도 먹이다가 어느덧 낮 3시 33분이 되었네. 여전히 햇빛은 쨍쨍, 바람은 미적지근,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부신데, 노트북 화면보다야 눈 건강에는 좋겠지.


  나는 이렇게 월요일 오전을 보냈고 한낮을 지나오고 있어. 일터에서 땀 닦고 있을 아빠와 엄마를 생각하면 민망하긴 하나, 허락받은 자유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아 볼게. 오늘도 두 편의 구상을 했고 많은 지식을 얻었어. 그런데도 마음이 허해서.... 변명의 의미로 편지를 쓰고 있는 거야. 부모님은 괜찮다는데, 자식이 문제야, 자식이! 부모님이 괜찮다는데도 불안에 떨면 어쩌자는 건지, 그치?


  나는 아빠를 사랑해, 엄마도 사랑해. 편지를 쓰는 게 즐겁기보단 슬퍼지는 걸 보면 사랑이 너무 큰 가봐. 지나치게 커서 슬픔이 되어버렸어. 그래도 슬픔을 느끼며 계속 써보려고. 내가 다른 집 자제들처럼 용돈 주고, 레스토랑 데려가고, 여행 보내주는 건 '아직' 못하겠지만 편지만큼은 아주 많이 쓸 거야. 언젠가 이 편지를 읽게 되면, 딸내미가 부모 사랑만큼은 뛰어나구나 생각해 줘~


  자몽허니 주스를 허벅지에 쏟은 칠칠이가 -

 

종강 후에 식비 걱정이 없는 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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