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이라는 2인칭 표현은 적합하지 않아 보입니다. 당신이란 말은 좋아하는데 연장자에게 쓸 순 없으니까요. 마땅한 칭호가 없어 '어른들'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때도 어른들이셨고, 지금도 변함없이 어른들이시니까요. 대학 생활을 회고하는 글을 쓰다가 어른들에게 말을 걸고 싶어 졌습니다. 실제로 연락드릴 용기는 없고요. 미워하지 않으려고, 편지나씀으로써 제 분노도다스리려는 겁니다.
한때는 날 믿는 대신 비교를 멈추지 못하는 엄마가 답답했습니다. "내가 사촌들보다 뭐가 부족한지 모르겠어"라는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애당초저울질 자체가 이해되지 않지만.... 굳이 따지자면 주관적으로든, 객관적으로든 저는 어른들보다, 어른들의 자제들보다 못나 보이지 않았거든요. 물론 20대를 기준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비교를 하려면 먼저 조건(나이)을 동일하게 맞춰야겠지요. 그럼에도 부족한 게 있다면 가정형편을 들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가난에 부모님을 원망한 적은 결단코 없습니다. 가질 수 없음에 떼쓰지 않는 법은 일찌감치 배웠으니까요.
이처럼 우리 엄마는 가정교육을 잘 시켰습니다. 아빠가 곁에 있든 없든 엄마는 자식들을 가난 속에서 올바르게 키우기 위해 애썼습니다. 친구가 제 책을 망가트렸을 때는 제게 친구가 실수할 수 있다고 말해줬습니다. 그런데 언니가 친구 책 한 페이지를 더럽혔을 때는 새 책을 보내준 게 납득이 안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엄마의 행동이 갈등이 커지지 않도록 개입해 준 어른의 배려라는 걸 압니다.
엄마는 강했고 지금도 강한 사람입니다. 이런 엄마를 때때로 약해지게 만든 건 저와 언니보다도 어른들의 동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정의 불행에 어른들의 동정이 꾸준히 부채질했음은 깨닫지 못하시겠죠.
아버지가 가장 아끼던 막내 동생, 애교만점에 어딜 가든 사랑받는 막내 동생이 결혼 후 고생만 하니 어른들의 마음도 아프셨을 겁니다. 하지만 힘든 사람에게 동정은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어른들도 각자의 결핍을 겪으셨으면서 왜 우리 가족에게는 함부로 동정을 던지시는 건지는 이해하지 않을 겁니다. 동정만큼 무례한 감정이 없음을,엄마에게 꾸준히 말해왔고 이제 엄마는 저를 믿어 주려 합니다.
엄마는 오래전에 한 가정을 이뤘습니다. 출가한 자제들에겐 잔소리를 피하시면서 엄마는 동생이라는 이유로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개입을 못 멈추시는 건지요. 사랑둥이 막내 동생도 엄마의 정의인 건 맞지만 제게 있어 엄마는 책임감이 강한 데다 본받고 싶은 멋쟁이입니다. 저는 엄마의 자식이고 엄마는 저의 엄마입니다. 이 관계는 어른들과 엄마의 관계(자매, 남매, 친구)만큼이나 끈끈하다고 봅니다. 제가 엄마와 산 세월이, 엄마가 어른들과 동거한 세월을 넘어섰으니까요. 엄마도 이제 50대이십니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친정으로 가자시는데도 저와 언니를 버리지 못한 분입니다. 그만큼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강했지만 마음으로는 무너질때가 잦았을 겁니다. 저는 엄마의 긴 고뇌를 들어왔습니다. 어른들이 엄마를 불쌍한 사람 취급하니까요. 그렇다고 저마다 가정을 이룬 어른들에게 기댈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엄마는 어린 저에게 의지했는데 모든 걸 털어놓은 엄마의 솔직함은 마냥 옳진 못했지요. 하나 엄마가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합니다. 동정을 다발적으로 듣는데 어떻게 강하게만 있을 수 있나요.
엄마대신 제가 밝히자면 어른들이 엄마에게 끼친 모욕이 한 트럭은 됩니다. 엄마는 어른들의 도움을 당연시 여긴 적이 없는데, 동정하다 말고 도와주기 싫어 버럭 화를 내다가, 으스대듯 돈을 건네는 어른들이 이상해 보였습니다. 남편 복 없는 사람은 자식 복도 없다고요? 자식을 버리지 못한 엄마가 그 말에상처받지 않을 거라 보신 건가요.그 말을 듣고 자란 저는 선택이 필요한 고비마다 제 마음보다도 어른들의 의견을 따랐습니다. 그래야 우리 엄마를 덜 동정하실 테니까요.
어른들은 "네가 직접 선택한 길"이라며 제 힘듦은 스스로 감내하라 하시지요. 삼촌은 무서운 아버지의 뜻을 따르시지 않고 경찰대 대신 명문대를 택하셨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어요. 저 또한 엄마의 뜻을 거스를 수는 있어도, 엄마의 사고에영향력을 행사하시는 어른들의 뜻마저 거스를 순 없었습니다. 제 행동이 결국은 엄마의 평가로 직결되는 게 무척이나 싫었으니까요. 이래도 제 온전한 선택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나요.
엄마가 지금도 어른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음은 압니다. 어른들이 수없이 던져주신,던져주고 계신 조언들. 그 조언을 가장한 무례가 우리 가족을 나아지게 만들었는지는,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는지는 자신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빠는 변했습니다. 제대로 된 직장을 찾았고 엄마에게 매달 생활비를 보내주며 사랑을 아끼지 않지요. 엄마는 아빠를 받아들였습니다. 저 또한 변했습니다. 어른들이 제 우울을 한낱 치기로 취급하시며 엄마를 회유하시니, 우리 가족은 제 정신을 죽이는 데 합세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겨냈고 가족을 용서했으며 가족과의 평생을 기약할 겁니다. 어른들의 바람대로 곧장 취준을 택하는 대신, 제 뜻대로 백수를 자청한 지금, 저와 엄마의 사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좋습니다. 엄마는 현재의 저를 받아들였고 저는 이 행복을 오래도록 유지해 나갈 겁니다. 진정 엄마를 가엽게 보시는 게 아니라면 저희의 나날에 잡언은 삼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어찌 됐든 어른들의 동정은 엄마를 향한 사랑이 바탕이지요. 그 때문에 어른들을원망하는 일은 과거에도, 지금도쉬울 수 없습니다.하나주제넘게 말해보자면,엄마의 장점인 배려가 어른들에겐 부재했던 거 같습니다. 머리에 피가 마르려면 한참 남은 어린이에게 군 행동을 기억하시는지요. 저는 엄마의 자식인 동시에 아빠의 자식이니, 아빠를 그토록 미워하시는 어른들에게절 향한 미움이 한 터럭도 안 생길 순 없었겠죠. 어른들은 언제 그랬느냐며 발뺌하실 게 뻔하지만, 아빠 없이 엄마밖에 없던제게, 엄마는 우리 집안이고 너는 다른 집안사람이니 저쪽으로 가라던 농담은 잊지 못할 상처가 되었습니다.
며칠 전, 엄마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승자는 엄마라고, 나와 아빠만큼 이 세상에서 엄마를 우선으로 둘 이는 없을 거라고. 남편과 자식이 엄마의 팬클럽 1호와 2호인데 엄마의 인생을재단할 필요성이 정녕있을까요.저희 가족을 그저지켜보시기만 하는 날이 빠른 시일 내에 오길 소망합니다. 저흰 행복합니다. 어른들도 저마다의 행복에 빠져드시길 바라요.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