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리어답터와 도도새
나는 생각 맥시멀, 물건 미니멀. 남편은 물건 맥시멀, 생각 미니멀.
난 1에서 출발하면 836까지 도착하는 사고의 흐름을 가졌다. 끝없이 펼쳐진 그물처럼 무한 확장.
남편은 1에서 출발하면 1-1, 1-2 순으로 목차를 만들어서 뭐든지 기획하는 사람이다.
글을 쓰기 시작한 뒤 포트폴리오 만드는 느낌으로 티스토리에 올리기 시작했다. 남편은 그때 옆에서 검색엔진 최적화, 키워드 광고 등을 떠올렸다. 많은 이들이 블로그로 돈 버는 방식.
남편의 프롬프트는 굉장히 길고 여러 가지 조건이 주어지며 '모르면 모른다고 말해줘'로 끝난다. 내 프롬프트는 말 그대로 자연어이다. 형식만 자연어가 아니라 정말 친구와 수다 떠는 느낌이다. 예를 들면 '오늘 꿀벌 한 마리가 이상하게 행동하는 걸 목격했는데 이게 무슨 의미일까? 꿀벌이 집을 잃은 걸까? 걱정돼'같은 호기심의 한마디로 시작한다.
정답의 지름길을 안내해 주는 내비게이션이자 정답 제조기로 AI를 쓰는 남편과 달리 AI와 수다 떨면서 관련 정보 뒤지고 번뜩 떠오른 것들을 엮어가며 TMI아궁이의 불을 지피는 나.
정처 없이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구름과 깊은 바닷속 무겁게 내려앉은 닻.
AI사용의 시작은 남편이 먼저였다. 얼리어답터. 도도새 같은 나는 그것에 거부감이 있었다.
평소 환경이슈에 관심이 많은 나는 데이터센터 냉각 기술에 관련한 다큐를 본 뒤 막대한 양의 물이 소비되는 AI사용이 얼마나 반환경적인지 얕은 지식에 기반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근데 지금은 나도 매일같이 사용 중이라는 사실.
작년에 겪은 남편 속옷에 관련된 일화. 우리 집은 속옷을 빤스라고 부른다. 애들도 그렇고.
여하튼 내가 새로 사준 남편의 빤스는 심리스 타입이라 겉과 속의 구분이 쉽지 않다. 허리 쪽에 케어라벨 대신 적힌 프린트가 안쪽임을 알게 해 준다. 어느 날부터 남편이 그걸 뒤집어 입는 걸 감지하고는 뒤집힌 거라 알려줬다. 그런데도 계속 그렇게 입었다. 그거 왜 또 뒤집어 입었느냐 물었더니 AI한테 안팎 구분방법을 물어봤고 이게 맞다고 답변 들어서 쭈욱 그렇게 입었단다. 열불이 났다. 그거 사 온 사람이 나인데, 매장에 걸려있던 순간부터 내 손으로 직접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하고 집에 와서 종이포장지 뜯어내고 세탁한 사람이 나인데. AI가 준 오답을 - 할루시네이션을 - 받아들이고 나를 오답자로 만들다니. 나에겐 한참 동안 AI를 거부할 이유가 분명했다.
남편은 사소한 물건들을 계속 사려고 한다. 숟가락 한 개라도 늘어나는 게 싫은 나와 정반대다.
바나나걸이, 자동 물비누 디스펜서 같은 것들. 내 생활엔 전혀 지장이 없는데 남편은 불편함의 개선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내가 정말 치를 떠는 중국발 택배들.
다행히 둘 다 공통으로 좋아하는 것들이 그래도 꽤 있다. 산책, 셜록 홈즈, 얼그레이 녹차, 콩국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