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joy."
점심먹으러 식당에 왔는데 차가운 물이 가득 든 스텐 물병과 거꾸로 놓여진 종이컵이 테이블 구석에 있다. 갑자기 더워진 날씨탓에 타들어가는 목에 물을 시원하게 들이붓고 보니 그제야 컵에 인쇄된 그림이 눈에 들어오고.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웃픈게 이거맞나.
동그랗고 큰 두 눈으로 손에 든 종이컵을 들여다보는건지 뭘 마시는건지 알수없는 지구의 모습.
음식이 나왔는데도 글을 쓰느라 먹질 못하는 나.
심지어 지구 밑에 ENJOY 라고 대문자로 브랜드 로고인척 적혀있다.
종이컵 그림에 숨겨진 의도가 뭘까. 디자이너의 sarcasm?
종이컵 생산업체의 입사 7개월차 사원이 과장에게 하달받은 뜬금없는 디자인 업무.
알바 한명 뽑아서 한 서너시간이면 되겠네란 생각으로 알바공고를 올린거야. 11시에 출근시켜서 중식 제공이면 개꿀까지는 아니어도 꽤 괜찮은 조건이라 생각하지. 점심시간에 꼰대같은 상사들없이 알바생하고 한끼 먹으면서 사회에 먼저 발디딘 인생 선배라는 우쭐함도 느껴볼테고. 그 정도면 주변 회사 사람들 누구나 가봤다는, 9천원이라는 놀라운 가격에 말도 안되게 맛있는 가성비 제육정식과 3천9백원짜리 아이스아메리카노까지 풀코스로 기꺼이 대접할 계획이야. 주방세제에 불어터진 고무장갑 냄새 풍기는 구내식당에서 하루쯤 벗어나 꽤 여유있는 사회인처럼 점심시간을 보내는 상상만으로도 기묘한 안도감을 느껴.
시급 14,200원.
4년제 대학 디자인관련 전공. 제품 디자인 유경험자 우대.
근무시간 오전 11시부터 4시간 정도.
중식 제공
점심먹으러 밖에 나가기 딱 좋은 날들이 계속 되는데 알바 공고에 반응이 안오네.
끌어올리기를 일단 클릭하고 비슷한 공고가 있나 한번 살펴라도 봐야지 하던 찰나 바쁘지 않으면 좀 와보라는 꼰대 상사의 시덥잖은 부름을 거절할 목적으로 알바 공고 수정에 열을 올리지.
뭐가 문제일까. 시급이 적은가? 일회용 컵 디자인이 대단하지도 않아보이는데.
여기에 모나리자 그려 넣을것도 아니고 요즘 트렌드에 맞게 에코, 귀염뽀짝 이런거 하자고.
아니야. 디자이너도 예술가니까 알바를 모셔오는 감성으로.
시급 15,200원
4년제 대학 디자인관련 전공. 제품 디자인 유경험자 우대.
근무시간 오전 11시부터 4시간 정도(상황에 따라 변경 가능)
맛있는 중식제공
예술적인 감성의 소유자분을 모십니다.
종이컵을 예술로 승화시키실 분! 바로 당신을 기다립니다.
이틀 후에 알바 지원서가 두건 접수됐고 그 중 한명은 전화를 안받아서 탈락시켰어.
통화를 해보니 적극적인 면모는 없어뵈지만 이력도 괜찮은데다 가까운 곳에 산다는 지원자.
근거리 거주자 우대 표시로 가득한 알바구직 사이트를 스크롤하던 시절이 문득 떠올라.
수요일은 학교 수업이 없다고해서 수요일로 협의를 하고 이변없이 출근을 했어.
약속한 대로 출근한 알바생이 기특해. 요즘 애들은 제멋대로인데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어.
디자인 전공하는 졸업반 학생이라고 상상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평범하군.
최신 유행을 따르거나 지독한 자기만의 취향을 고집하는게 아니라 다행이야. 점심 먹으면서 몇마디 걸어도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거나 요즘 세대 특유의 눈으로 욕하기를 시전할것 같진 않아.
귀엽고 친환경스러운 감성으로 알아서 잘 해달라고 부탁하고 자리로 돌아갔어. 말수가 별로 없어서 그런지 자세한 질문이나 더 궁금한것은 없다고 해서 일단 기다렸어.
40분 정도 지났을까. 알바생이 작업이 끝났다고 시안을 저장해 놓은 폴더를 바탕화면에 끌어다 놓았으니 확인하시면 된다고. 심지어 12가지 시안을 만들었으니 맘에 드시는거 적어도 한개는 있을테니 자기는 이만 가보겠다고. 벌써? 급한 일이 생겨서 점심은 못먹지만 약속한 시급은 다 주셨으면 좋겠다고 하길래 그건 걱정안해도 된다며 아끼는 후배 대하듯 상냥하게 대답했지.
내껀 식어도 상관없는 비빔밥이라 다행이다. 같이 나온 콩나물 국은 미지근해졌지만.
어제 저녁에 갔던 고깃집에도 이 종이컵이었네.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