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아프게, 때로는 분노하며
서점 특유의 분위기는 사람을 끌어당긴다.
정갈하게 정리된 책들, 차분한 분위기와 조용한 오후의 햇살, 그리고 가만히 텍스트를 음미할 수 있는 비어있는 시간들이 서점을 들르고 싶게 만든다. 책을 좋아해서 참새가 방앗간 들르는 것 마냥 들르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서점의 이런 분위기를 상상하면서 서점에 발을 들여놓는다.
공들여 큐레이션하고 꾸며진 서점은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탁 풀리고 어딘가 치유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감성을 기대하고 온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눈에 띄는 매대에는 다정하게 말을 거는 에세이들이 진열되어 있다. 대형 서점, 동네 서점 할 것 없이 앞에 진열된 매대에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힐링 에세이가 많이 나와 있다. 사람들도 찾는 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 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책을 들여다본다. 진열된 책들도 그런 마음에 화답하듯이 아픈 마음에 공감을 해주고 달콤한 휴식처럼 여유 있는 말들을 들려준다.
그런 매대를 지나 서점 깊숙이 들어가 둘러보면 앞에 진열되어 있는 책보다는 좀 더 묵직한 책들을 만날 수 있다. 고전, 인문학, 과학 등 가지각색의 책들은 서점 안 쪽에 놓여있다. 에세이보다는 좀 더 어려운 책이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책들을 읽는 것도 나름대로 좋은 힐링이 될 수 있다. 드로잉북에 색을 칠하는 것처럼 가만히 집중을 하는 활동은 스트레스를 줄여준다고 하니 말이다. 독서 역시 오랫동안 현실에서 벗어나 한곳에 집중하는 활동이기에 충분히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에세이뿐만 아니라 어떤 장르의 책이라도 자신이 집중해서 읽을 수 있는 책을 읽으면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고 힐링도 할 수 있다.
어떤 책이라도 이렇게 마음을 치료하고 쉬게 해 줄 수 있지만, 책은 힐링만을 전달해주지는 않는다. 차분한 분위기와 머물고 싶은 은은함을 간직한 서점이라도 그 안에 있는 책들은 다양한 세계를 담고 있다. 일상을 담은 포곤한 에세이도 있지만, 칼 세이건의 과학책들 같이 순식간에 정갈한 서점에서 멀어져 우주 속에 빠지게 만들어 주는 책들도 있다. 이런 책을 읽으면 먼 우주를 바라보는 듯한 경이감이 든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으면 바다 한가운데서 사투를 벌이는 긴박함을 느낄 수 있고, <인간 실격>을 읽고 나서 슬픔과 허무함에 빠질 수도 있다. 아동 학대 같은 사회적 문제나 전쟁에 관한 책을 읽으면 깊은 슬픔과 엄청난 분노를 느낄 수도 있다.
이렇게 책들은 단아한 서점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숨기고 있다. 어떤 책의 세계는 너무나 아프고 괴로워서 읽는 사람을 무척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어린 시절에 소설 <가시고기>를 읽고 한참을 울었다. 눈물이 계속 떨어지며 마음이 따뜻하기도 하고 쓰라리기도 한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채 많이 울었다. 가끔 이런 책을 만나면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더 이상 책을 읽지 못할 때도 있다. 책이 주는 아픔이 너무나 커서 손을 댈 수 없는 탓이다.
좋은 책은 이렇게 사람의 마음에 큰 울림을 준다. 읽은 사람의 감정을 흔들어놓고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세상을 열어준다. 이런 책을 만나면 단순한 힐링뿐만 아니라 이전에 느껴본 적 없는 새로운 감정을 가득히 채우게 된다. 그럴 때면 마음이 쿵하고 울리며 내 안의 세계가 깨져 나가는 기분이 든다.
신기하게도 좋은 책은 그렇게 마음을 깨부수고도 어딘가 치유되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전쟁에 관한 책을 읽고 인간의 잔혹함과 끔찍한 사실들을 마주한 이후에도, 어딘가 다른 세계를 체험하고 나온 듯한 기분은 남는다. 찜찜하고 어딘가 진득한 느낌이 드는 미스터리 소설도 좋은 소설이라면 괜히 읽었다는 생각보다는 무언가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계속해서 여운이 남고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책일수록 묘하게 머리를 씻어낸 듯한 상쾌함을 준다.
아마 한참 몰입을 한 결과 스트레스가 풀린 걸 수도 있고, 나만의 세계가 깨졌을 때 느끼는 상쾌함도 있을 수 있다. 호기심이 풀린 듯한 개운함도 있을 테고 말이다. 좋은 책은 읽는 사람에게 그런 감정을 전해준다. 주말 오후에 은은한 햇살 속에서 조용히 좋은 책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 어딘가 잔뜩 치유되는 기분이 드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사람마다 자신에게 맞는 책은 다 다르지만, 자신에게 꼭 맞는 책을 찾아 읽는 건 힐링이 된다. 하지만 독서로 힐링만 얻을 수 있다고 말하기에는 아까운 감이 있다. 가끔은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아픔을 기록한 책이나 평소에 보지 못했던 분야로 눈을 돌려보면 알 수 있다. 그런 책을 만나면 힐링뿐만 아니라 모험을 떠난 기분, 겪어보지 못한 감정으로의 이입, 새로운 시각 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새 로운 세상을 접하다보면 나 자신이 한층 더 성숙해지기도 한다.
간접 체험이라도 다른 사람의 감정을 겪어보면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의 폭이 더 늘어난다. 그러다 보면 타인의 입장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생각도 깊어진다. 그러니 가끔은 서점 깊숙이 들어가 내 마음을 휘젓는 책들을 찾아 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힐링뿐만이 아니라 모험심, 슬픔, 분노, 용기 등을 찾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카프카는 독서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다른 말보다도 이 말이 힐링 외의 독서의 기능을 잘 설명해주는 것 같아서 이 말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려 한다.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꽁꽁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수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 프란츠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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