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독서의 계절이라 했을까
노벨 문학상의 계절이다.
올해는 아니 에르노의 책이 진열되어 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주목받지 못하던 책들이 마케팅 대상이 되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물론, 나도 평소에는 관심이 없던 독자 중 한 명이지만, 서점에 즐비한 마케팅 수단에 넘어가 아니 에르노의 책을 샀다. 참 문학상의 힘이란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주목받지 못하던 책을 발굴하는 역할을 해준다고 할까.
아니 에르노의 책들을 사는 김에 다른 책들도 여러 권 샀다. 흑인 여성 최초로 노벨상을 받은 토니 모리슨의 <타인의 기원>, 정용준 작가의 에세이 <소설 만세> 등 책상 한 켠에 새로 산 책들이 쌓여있다. 나는 새 책의 빳빳한 느낌을 참 좋아하는데, 가을에 산 책은 습기가 적당해서인지 새 책 같은 기분이 오래간다. 365일이 가을 같다면 책을 보관하기 좋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서점 사장님들은 가을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 것 같다. <이러다 잘될지도 몰라, 니은 서점>에는 가을을 원망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독서의 계절이라는 가을에는 오히려 책이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날씨가 선선하고 맑아 사람들이 외출을 많이 해서 책을 많이 사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일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나도 책을 사놓기만 하지 공원을 산책하거나 멀리 드라이브를 다녀오는 일이 많아졌다. 주말이면 어디 나가지 못해 좀이 쑤신다. 가만히 집에만 있기에는 이 청명한 날씨가 너무 아깝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독서와 멀어지는 것 같다. 써놓고 보니 서점 사장님들이 통탄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얼마 전에는 파주 지혜의 숲으로 드라이브를 다녀왔다. 이왕 가는 김에 책에 관한 곳을 들려보자고 생각했다. 파주까지는 제법 멀어서 꽤 의지를 발휘한 셈이다. 출판 단지 초입부터 정갈하게 서있는 출판사 건물에 괜히 설레며 지혜의 숲으로 들어갔다. ‘아, 난 출판사에서 일해야 했어’ 하는 생각을 삼키며 차에서 내렸다. 파주의 조용한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출판사 건물들도 화려하진 않지만 정갈하고 각자 개성 있어서 하나씩 들어가 보고 싶었다. 출판 업계의 혹독한 현실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살짝 들었더랬다.
오후에 도착하니 지혜의 숲은 제법 사람이 많았다. 어린이를 동반한 부모님들이 대부분이었다. 조용히 책 읽을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독서의 계절을 나름의 방법으로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지혜의 숲 자체는 도서관이지만 안에 책을 살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어서 책을 구입하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지혜의 숲 규모에 비하면 구입할 수 있는 책은 좀 적어서 아쉽긴 했지만 말이다.
옥상에는 헌책방 가게도 있어서 둘러볼만했다. 역시 여기도 규모는 크지 않아서 책 사냥을 하기에는 조금 모자라긴 했다. 아쉬운 대로 천천히 둘러보면서 이런 책도 있었지, 저런 책도 있었지 하고 기억을 상기시키는데 그쳤다. 근처에는 지지향이라는 숙소도 있는데, 예전에 들렀던 기억으로는 방 별로 작가 테마가 있었다. 해당 작가의 책을 방 안에 비치해두고 작가의 글을 벽에 새겨두었는데 그것도 소박하니 멋스러웠다. 지혜의 숲은 그 정도만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밖에도 걸어서 동네 서점에 간다거나 아크앤북처럼 대형 서점을 구경하거나 하는 주말을 보내고 있다. 날씨를 즐기면서 책도 찾아 읽으며 나름 독서의 계절에 맞는 외출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서점에 큐레이션 된 책을 천천히 살펴보다가 한 두 권 집어 드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렇게나마 출판계의 가을 매출에 소소한 보탬이 되고 있다.
독서의 계절이니 서점에서 독서 관련 프로모션을 할 만도 한데, 아쉽게도 그런 프로모션은 거의 전무하다. 사람들이 가을에 책을 읽지 않는 탓이겠거니 한다. 책을 꾸준히 구입하면서 책에 돈 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점이 아쉽다.
날이 좋으니 서점에 직접 찾아가서 책을 살펴볼 수 있는 프로모션이 있으면 어떨까. 경치 좋은 곳에서 책과 단풍을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고 놀러 갈 때 들고 다니기 좋은 책을 홍보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책을 팔만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자꾸 이렇게 출판사 좋은 아이디어만 생각이 나니 또 출판사 직원을 하는 게 적성에 맞지 않았을까 싶어 괜히 웃음이 난다.
가을은 책에 잔혹한 계절이라 동네 책방처럼 작은 책방은 고생이 심할 것 같다. 책이 많이 팔려야 더 좋은 책이 많이 나오고 서점도 많이 생길 텐데 말이다. 어떻게 또 이 짧은 가을이 지나 추운 겨울이 오면 따뜻한 장판 위에 누워 책을 쌓아놓고 읽을 날도 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바지런히 놀러 다니면서 책도 읽고 쌓아두기도 하며 지내보려 한다. 아이러니하지만 독서의 계절이 지나고 나서야 나도 사람들도 본격적으로 독서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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