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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김 Jan 09. 2021

겸손한 명인의 이야기

조율의 시간 - 이종열


현악기나 관악기를 연주해본 사람이라면 종종 직접 음을 맞춰야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가장 대중적인 악기이지만, 직접 조율할 수 없는 악기가 있다.

바로 피아노인데, 피아노는 전문 조율사가 아니면 연주자가 직접 조율을 하는 일은 거의 없는 악기이다. 

이 책은 그런 피아노의 조율 부문 명장 1호로 뽑힌 조율사가 쓴 책이다.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무대 뒤의 이야기가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피아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피아노를 자세히 알 수 있는 내용이 잔뜩 들어있는 책이다. 하지만 나는 엔지니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기술적으로 높은 경지에 있는 사람의 겸손한 이야기를 듣고 많은 것을 배운 느낌이 들었다.



표지조차 피아노와 장인의 느낌이다



짧은 에세이를 조각조각 모아놓은 듯한 책이라 읽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죽도록 노력하라고 외치기만 하는 자기 계발서 같은 부담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반대로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순수함이 느껴졌다. 세상의 모든 훌륭한 기술자들이 자신의 일을 예술로 여기듯이 저자 역시도 조율을 예술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깊이 자신의 음악에 심취해 있는 연주가와 마찬가지로 순수하게 자신의 일을 좋아하는 열정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그렇다고 여느 장인이 그렇듯이 오랜 세월을 겪은 경험은 열정만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어느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시련을 겪어야 하고,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길만을 갈 수는 없다는 사실 또한 이 책에서 엿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묵묵히 자신만의 해법을 찾아내는 담담한 이야기들에서, 나는 자신을 앞으로 내세우지 않는 겸손한 장인을 볼 수 있었다.


저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무척 독특하면서도 엔지니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 단소를 만드는 방법을 보게 되었던 저자는 스스로 단소를 만들어보기에 이르렀다. 처음 단소를 만들어 본 후에는, 이렇게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서양 음계를 내는 단소를 만들어보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어떤 기계나 프로그램을 만들어본 기술자라면 이 부분에 크게 공감했을 것이다. 처음으로 내가 생각한 것을 내 손으로 만들어 보는 기쁨이 생각나서 나는 나도 모르게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천재성을 보이는 장면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자랑하지 않고 옛 시절을 회상하는 듯한 담담한 문장에 빠져들기도 했다.


해방과 전쟁을 겪던 가난한 시절에 조율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열정으로 일본에서 나온 책을 공부하며 익혔다는 장면 역시도, 개인적인 어려움에 대한 서술은 거의 없이 단지 음정이 좋았고 잘 안 되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는 이야기뿐이다. 기술에 대한 열정 없이는 이런 식으로 서술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닌가.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이 대단한 어려움을 겪었고, 그래서 1호 장인이 되었다는 식으로 덧붙일 만도 한데 저자는 그런 것보다는 책을 얻었던 기쁨이 더 소중해 보였다.




이 책은 그런 장인의 겸손함 말고도 피아노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크게 흥미로울만하다.

특히 클래식 애호가들이 더 가슴이 뛸만한 이야기가 많은데, 저자가 유명 피아니스트들이 내한했을 때 직접 피아노를 조율한 경험이 많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무대 뒤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한 것들이 많았다. 나도 예프게니 키신(Evgeny Kissin)을 좋아하는데, 키신의 내한공연을 3번이나 조율한 이야기에 무척 두근거렸다.


https://youtu.be/B9q7zDwUEz0

키신의 라 캄파넬라(La Campanella - Liszt) "종"이라는 뜻답게 여러 개의 종을 연주하는 듯한 느낌이 몽환적이다.


그 외에도 조지 윈스턴, 막심 므라비차 등 다양한 피아니스트들의 이야기가 한 곳에 묶여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조금만 더 길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면 좋았을 텐데, 피아니스트들의 이야기가 무척 짧아서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면서도 피아노가 있는 공간, 연주자의 습관, 다른 악기들의 음정과 피아노 음정의 조화 등 무척 많은 것을 세심하게 고려했던 에피소드들이 실려있다. 최상의 소리를 들려주기 위한 노력이 아니고서는 지나칠 수 있는 많은 것들 역시도 빠지지 않고 들어 있었다. 한 분야의 정상에 오른 분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피아노 조율에 필요한 세세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저자가 얼마나 일에 심취해있는지, 자신의 건강 역시도 아름다운 음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태도 역시도 참 많은 울림을 주었다. 


그런 만큼 이 책은 피아노에 문외한이면 어려울 수 있다. 그랜드 피아노 한 대를 근처에서 보았던 사람이라면 딱히 어려움은 없겠지만, 아예 피아노를 악기 중 하나라는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면 와 닿지 않는 이야기일 수 있다. 어떤 자극을 받거나 명인으로서의 이렇게 노력했다 같은 것을 기대하기에는, 이 책은 너무 건조하다. 그렇게 드라마틱한 일도 별로 없이 잔잔히 흘러가는 데다가, 자칫 "조율사 말을 안 들으니 그렇지"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웬만하면, 좋아하는 피아니스트가 있거나 피아노라는 악기에 애정이 깊을수록 이 책에서 더 많은 감명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노하우란 생각보다 쉬운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독일에서 견학을 한 저자가 "노하우란 생각보다 쉬운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란 구절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나는 소프트웨어 개발자인데, 선배 개발자들이 나보다 쉽게 해내는 일들이 궁금해서 물어보거나, 어떻게 이런 게 되지? 하는 호기심에 찾아보면 종종 마법 같아 보였던 일들이 훨씬 쉬운 방법들인 경우가 있다. 나는 이 한 문장에 크게 공감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깨달은 것을 엄청난 것으로 포장하기는커녕 담담한 문체에 놀랐다. 전반적으로 나에게 이 책은 이런 감정을 수시로 주는 책이었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갈지 궁금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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