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로서의 번역 - 고노스 유키코
나는 유달리 영어 공부에 관심이 많다. 딱히 시험을 준비하지는 않지만, 원서로 읽어야 하는 일이 잦아서 그렇다. 요즘은 특히 처음으로 번역을 하게 되어 영어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통감하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영어 공부를 하면 할수록 새로운 문화와 표현을 만나는 재미를 느끼는 중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런 관심이 아니었다면 굳이 이 책을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번역에 관심이 있지 않고서야 이런 제목의 책을 고를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일본어 원제는 "번역이란 무엇인가"이다. 얇은 책에 이런 무거운 제목이라면 사람들에게 외면받을 이유는 충분하다.
하지만, 그래도 기본 이상의 영어실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인기 절정의 영화 어벤저스 때에 이르러서야 오역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가 알려졌다. 대학에서 원서로 공부를 해본 사람이라면 간간히 느꼈겠지만, 오역은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이다. 내용 자체를 변질시키거나 누락시켜 전혀 다른 뜻을 만들어낸다. 차라리 영화 한 편이야 불쾌한 경험이라고 넘어갈 수라도 있지만, 외교문제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문제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오역이 나타나는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구글 번역기나 파파고가 있는 현재에도 전문 통역사가 있는 이유는 장소나 시간, 목적(또는 문맥)에 따라서 문장이 전혀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통역기 또는 통역사가 이를 게으르게 살피면 단순히 단어 치환 수준의 번역 밖에 만들어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전혀 맞지 않는 엉뚱한 뜻을 만들어낸다.
이 브런치에서는 소개하지 않았지만, '에도의 독서회'라는 책에서는 일본이 처음 의학, 기초과학 등의 서양학을 받아들이면서 번역을 시작한 모습이 상세히 나와있다. 이 책에는 사전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시기에 네덜란드어를 해석하기 위해 토론을 했던 시대가 배경으로 나온다. 이 시대를 거치며 Speech 가 '연설', Debate가 '토론'이라고 번역되었는데, 우리나라는 이 번역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렇듯 번역은 다른 나라에 추상적인 개념을 심어주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가 이런 작업을 한 경험이 일본보다 적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다시 본론의 책으로 돌아오면, 이 책의 번역가는 다수의 서양 고전을 일본어로 번역한 번역가이며, 우리나라 책으로는 '82년생 김지영'을 번역하였다. 번역 경험이 많은 만큼 실용적인 설명이 많은 책이었다. 짧게 소개를 하면 이 책은 '과제문'이라는 형태로 서양 고전(빨간 머리 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의 일부 텍스트들을 옮겨오고, 이를 토대로 번역을 하는 과정이 마치 강의를 듣는 듯이 이어진다. 과제문을 읽으면서 원문을 보면서 '어? 이건 이상한 뜻이 되어버려서 못 알아듣겠는데' 하는 의문을 저자가 당시의 시대와 문학의 사조를 들려주면서 통쾌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 과정을 통해 번역은 앞서 말한 개념을 가져오는 작업이자 동시에 단순히 문장을 옮겨오기만 해서는 안 되는 작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책에 따르면 번역은 또 '원문의 맛이 나도록' 또는 '의미를 알 수 있도록' 등 여러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내가 다루기에는 방대한 주제라 이에 대해서 쓰는 것은 피하려 한다.
원서를 읽거나 영어로 된 블로그, 기사를 읽다 보면 가끔 단어 하나하나의 뜻은 알겠는데 문장의 뜻을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경험적으로 어떤 문장은 다른 뜻으로 쓰이는 구(句)라는 느낌이 들어서 사전을 찾아 숙어로 읽으면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 경우도 아니라면 난감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종종 여기서 곤란을 겪고는 했는데, 이 책에서 힌트를 얻었다. 만약 내가 번역을 한다면 어떻게 해석했을까?
뜻을 모르는데 번역을 어떻게 할까?라는 의문이 먼저 들기 시작하지만, 우리말로 통째로 쓴다고 생각하면 단순히 해석만 하는 것보다 더 넓고 자신감에 찬(!) 시야로 읽게 된다. 먼저, '결국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고 두 번째로 '저자는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이 들게 된다. 그리고 '이 글의 용도는 무엇일까? 이 문장은 이 글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끊임없이 든다. 그렇다면 좀 더 명확하게 문장에 접근할 수 있다. 아, 작가는 단순히 (안 웃기는) 유머를 하고 있구나! 같은 생각 말이다. 물론, 관련된 배경지식을 조금 더 찾아보거나 작가의 이전 글을 찾아보면서 좀 더 폭넓은 이해를 할 수도 있다.
아마도 우리말로 쓰여있다고 해도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 섞여있을 때도 있을 것이다. 작가의 시점에 따라서, 또는 화자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다. 또는 작가가 한창 기술문서를 충실하게 써 내려가다가 갑자기 '마치 거북선 같지 않은가!' 같이 시대적 배경을 이해해야만 알 수 있는 문장을 사용할 수도 있다. 외국인이라면 '갑자기 여기서 왜 거북이랑 배가 나와?'하고 충분히 곤란할만한 문장이다.
이처럼 영문을 읽을 때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읽기로서의 번역'이라는 제목이 붙은 것 같다. 원제인 '번역이란 무엇인가'보다도 좀 더 읽기에 무게가 실려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나 과제문이었던 '어셔가의 몰락'은 상당히 읽기가 힘들었는데, '아라베스크 문체'라고 작가가 설명해주며 특유의 만연체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긴 문장을 따라가면서 독자가 더욱 긴장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을 듣고 나는 그제야 과제문을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면서 수많은 말장난들을 번역하는 번역자의 노고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번역에 관심이 없더라도 영문을 읽을 때 도움받을만한 내용이 많아서 다른 사람에게도 추천을 하고 싶어 지는 책이었다.
과제문으로 실린 작품들은 아까 소개한 작품 외에도, '호밀밭의 파수꾼(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피그말리온(조지 버나드 쇼)', '등대로(버지니아 울프)' 등이 실려있다. 일부분이지만 차분히 읽다 보면 원서를 읽으며 작가의 느낌을 그대로 느껴보는 재미도 있다. 나 같은 경우는 과제문을 필사했는데, 필사하는 재미도 꽤 쏠쏠하고 유익했다. 영어 문장력도 좋아지고 '영어로 표현을 이렇게 자유롭게 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명작이 사용하는 어휘력은 평소에 내가 느끼는 영어의 느낌과는 또 달랐던 것 같다.
책 자체는 작고 얇다.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판권이 작고 페이지도 230 페이지가 안되니 가볍게라도 꼭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이미 영어 전문가 레벨이거나 번역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이라면 굳이 읽을 필요를 못 느낄 것 같다. 영어 중급 이상의 수준에서 조금 더 고급 영어로 올라가고 싶은 사람이 가장 재미있게 읽기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번역이란 것은 꽤 힘든 작업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