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창의성에 대한 고찰
며칠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간장 계란밥을 먹으려 했는데요. 프라이팬을 꺼내는 게 너무 귀찮았습니다. 가스불을 켜고 직접 요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중에 설거지까지 해야 하는 게 싫었지요. 그래서 국그릇에 계란을 톡톡 까서 넣고, 전자레인지에 돌렸습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가끔 전자레인지에서 툭툭하고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지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전자레인지에서 다 익은 계란을 꺼내고 밥을 올린 채, 간장을 꺼내려고 할 때였습니다.
갑자기 퍼-엉! 소리와 함께 노른자가 폭발해 버리더군요. 부엌은 노른자와 밥풀의 잔해로 엉망이 되고, 저는 환장할 것 같은 기분으로 청소를 해야 했습니다. 오늘의 에피파니는 계란을 전자레인지에 돌릴 때는 노른자를 포크로 쿡쿡 찔러줘야 한다는 생활 지식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군요.
만약 요리를 전혀 해보지 않은 청소년이 나중에 미슐랭 3 스타 오너 셰프가 되고 싶다면 무엇을 익혀야 할까요? 일단은 식재료와 요리 도구에 관한 지식부터 습득해야 할 겁니다. 다양한 식재료의 맛과 손질하는 방법, 칼을 쓰고 불을 적당히 다루는 방법을 익혀야겠지요. 전자레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아둬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처럼 계란을 폭발시킬 테니까요.
간단한 요리부터 플레이팅까지 직접 손으로 해보는 경험도 필요하겠죠. 많은 숙련 기간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미슐랭 3 스타 오너 셰프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AI가 등장해서 “내가 미슐랭 3 스타 레벨의 요리를 할 수 있어!”라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평소에 라면도 끓여본 적 없거나 먹어 본 음식도 많지 않은 사람이라면 AI에게 “그렇다면 미슐랭 3 스타 레벨의 요리를 해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결과물이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에스카르고(달팽이) 요리라거나 입에 맞지도 않는 푸아그라가 나온다면 실망하겠지요. 그러나 정말 요리를 열심히 해온 사람이라면 구체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을 겁니다. “한식의 맛을 표현했으면 좋겠어. 고기는 차돌박이를 사용해서 미나리와 함께 준비하고, 김치는 묵은지를 살짝 씻어서 차돌박이와 미나리를 감쌌으면 좋겠어. 소스는 분자 요리를 할 거야. 된장을 사용해서 어쩌고…….”라고 명령한다면 꽤 만족스러운 요리가 나오겠죠.
이처럼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같은 AI로도 다른 결과물을 낼 수 있습니다. “나는 아인슈타인처럼 위대한 이론을 발견할 거야!”라고 마음먹는다 해도 미적분을 모르고서는 물리학 논문을 쓸 수 없는 노릇이죠. 만약 AI가 써낸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을 테고요. AI 시대에도 인간은 직접 지식을 쌓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AI 시대의 인간은 어떤 창의성을 발휘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AI가 할 수 없는 창의적인 활동이 뭔지, 애초에 창의성이 뭔지 뚜렷하게 알지 못한 채 말이죠. 다들 지식보다는 창의성이 인간에게 존재 의미를 부여한다고 믿는 모양입니다. 어쨌든 이 문제는 수많은 학자들이 치열하게 논의하고 있을 테고, 그 외의 사람들도 열심히 답을 찾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저라고 뚜렷한 답을 내놓지는 못할 겁니다. 다만 과거의 사례를 통해 창의성이 무엇인지 여러분께 실루엣 정도는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정을 해봅시다. 아인슈타인의 시대에 AI가 있었다고요.
AI는 그 시대의 모든 지식을 학습했을 겁니다. 최신 물리학 실험과 여러 물리학자들의 견해를 모두 섭렵했을 테죠. 그런 AI에게 아인슈타인이 질문합니다. “사실 광속이 일정한 거고, 시간과 공간이 광속에 맞춰서 변하는 건 아닐까?” AI는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그 당시에는 한 번도 연구되지 않은 사실이고, 기존의 뉴턴 물리학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기존의 연구 결과를 학습한 AI는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흥미로운 가설입니다만, 물리학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연구 결과들과 뉴턴 물리학에 관한 정보들을 내놓을 겁니다. 운이 좋다면, 최근의 실험 결과들을 내놓으면서 참고해 보라고 할 수도 있겠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마이컬슨-몰리의 실험 결과(빛의 속도는 지구의 운동과 관계없이 항상 일정하다는 결론을 낸 실험입니다)를 바탕으로 나온 것이기도 하니까요.
어디까지나 제 가정이긴 합니다만, 아인슈타인 시대의 AI는 특수 상대성 이론을 부정했을 겁니다. 어쩌면 마이컬슨-몰리의 실험 결과를 아인슈타인에게 알려주면서 특수 상대성 이론의 정립을 조금 더 앞당겼을 수도 있을 테지만요.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인간이 가져야 할 창의성이 무엇인지 조금은 감이 잡히실지 모르겠습니다. AI로서는 답을 내지 못하는 문제를 인간은 풀어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AI가 내놓는 근거를 자신의 지식과 논리로 반박할 수 있어야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지식과 지식을 지탱하는 체계들을 분명하게 세워놓아야 합니다.
앞 선 예시에서 인간은 기존의 지식을 뒤엎는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창의성의 예시를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은 서로 관련 없는 지식을 이어 붙이거나 뒤섞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AI가 좀 더 발달하면 이런 것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만, 시중에 나와 있는 대화형 AI로만 봤을 때는 아직 이런 창의성을 보이는 것 같진 않습니다.
이번에는 중세 수도사에 대해 떠올려 봅시다. 하나의 주제를 놓고 사람들은 여러 가지 연관된 것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이나 과학기술이나 의료 수준, 수도사들의 생활상, 그들의 삶의 목표 같은 것들을 떠올릴 수 있겠지요. 여기까지는 AI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인간이 엉뚱한 생각을 추가합니다. “중세 수도사가 살인 사건을 수사한다면?”
이 엉뚱한 생각에 중세의 지식과 여러 철학을 섞어서 만든 작품이 바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입니다.
읽어 보신 분도 계시겠죠?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에 관한 지식, 상상력은 굉장합니다. 중세에 관한 지식도 풍부할뿐더러 철학적으로 풀어낸 결말 역시 대단하죠. 거기에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을 오마주한 도서관 형태 역시 다양한 지식을 하나의 작품에 묶어 놓은 걸작입니다.
지금의 AI로서는 이런 작품을 만들기 어려울 겁니다. 만약 이런 작품을 AI로 써내려면 AI를 이용하는 사람이 움베르토 에코만큼 지식이 깊어야겠지요. 각종 지식과 문학적 식견을 한 데 묶는 능력도 뛰어나야 할 테고요. 이렇게 생각하면 AI 시대에도 인간은 여전히 많은 지식을 익혀야 하고, 사유를 체계화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앞서 든 예시들로 창의성에 대해 조금 감을 잡으셨나요? 다만 너무 거장들의 예시라서 엄청나게 느끼셨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직접 제미나이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 것을 보여드리려 합니다. 제가 프롬프트 엔지니어라거나 거창하게 AI를 사용해 본 적은 없어서 좋은 예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참고하시기엔 괜찮을 거라 생각합니다.
먼저 재미있는 질문을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어떤 그림을 그리는 게 좋을까요?
(아래의 Q.라고 쓰인 부분이 제가 입력한 프롬프트이고 A.라고 대답한 부분이 제미나이가 답변한 내용입니다. 참고해서 읽어주시면 되겠습니다.)
Q. 실험을 하나 해보자. 만약에 네가 화가라고 생각해 봐. 전시회에 출품을 하는데 전시 주제가 '음악'이야. 그러면 너는 어떤 그림을 그릴 거야?
A. 흥미로운 실험이네요! 제가 화가라면, 단순히 악기나 연주자를 그리는 방식보다는 '소리가 시각으로 변환되는 찰나'를 포착하고 싶을 것 같아요.
저는 [공감각적 잔상: 푸른색의 변주곡]이라는 제목의 추상화를 그리겠습니다.
작품의 구상: "공감각적 잔상"
음악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마음속에 일정한 형태와 색채를 남긴다고 생각해요. 제가 캔버스에 담고 싶은 요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배경 (리듬과 공간): 전체적으로는 아주 깊은 남색(Midnight Blue)에서 시작해 위로 갈수록 투명한 하늘색으로 변하는 그라데이션을 사용합니다. 이는 음악이 가진 "공간감과 깊이"를 의미해요.
* 중심 소재 (선율): 캔버스 중앙을 가로지르는 날카롭고도 부드러운 "금빛 곡선"들을 그려 넣을 거예요. 바이올린의 높은 고음은 가늘고 날카로운 선으로, 첼로의 저음은 묵직하고 두꺼운 질감(임파스토 기법)으로 표현합니다.
* 디테일 (리듬의 파편): 음악의 비트나 타악기 소리는 캔버스 곳곳에 흩뿌려진 "작은 점들과 기하학적인 도형"들로 나타냅니다. 마치 악보 위의 음표들이 중력을 벗어나 자유롭게 유영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거죠.
전시 의도
"음악은 흐르는 순간 사라지지만, 그 소리가 우리 영혼에 부딪혀 만들어낸 '색깔'은 영원히 남습니다. 저는 관객들이 제 그림을 보며 귀가 아닌 눈으로 선율을 듣는 경험을 하길 바랍니다."
이 그림의 '포인트'
만약 전시장에 이 그림이 걸린다면, 저는 작품 옆에 작은 QR 코드를 두고 싶어요. 그 코드를 찍으면 제가 이 그림을 그리며 영감을 받았던 "재즈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오게 하는 거죠. 시각과 청각이 만나는 완벽한 접점을 만드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혹시 제가 설명한 이 그림의 분위기가 머릿속에 그려지시나요? 아니면 당신이 생각하는 '음악'의 이미지는 좀 더 강렬하거나 고요한 쪽인가요?
원하신다면 제가 구상한 이 그림을 직접 이미지로 생성해서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어요?
Q. 응. 보여주라.
A.
제미나이가 그린 그림을 보고 제법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름대로 ‘음악’을 회화로 해석한 것도 흥미롭다고 생각했고요. 하지만 음악을 추상화로 보여주기에는 좀 뻔한 그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생각한 음악에 대한 해석을 조금 더 덧붙이기로 했습니다. 최근에 <전쟁과 음악>이라는 책을 읽었는데요. 거기서 얻은 지식을 활용해 저만의 관점을 프롬프트에 추가해 보았습니다.
Q. 좋아. 이번에는 네가 이런 걸 표현하고 싶다고 해보자. 너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알고 있는 화가야. 기존의 음악이 새로운 음악으로 변할 수 있고, 새로운 음악이 음에 대한 정의나 본질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 그렇다면 어떤 그림을 그릴 거야?
A.
Q. 그림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지 설명해 주겠어?
A. 스트라빈스키의 불협화음과 쇤베르크의 무조주의를 이해하는 화가로서, 저는 기존의 '아름다운 질서'를 해체하고 "음악의 본질적인 구조를 재정의하는 파격"을 화면에 담았습니다.
이번 작품의 제목은 [해체된 옥타브: 12개의 평등한 중력]입니다.
작품의 핵심 의도
1. 불협화음의 시각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 원시적 에너지: 그림 중앙을 가로지르는 거칠고 불규칙한 선들은 《봄의 제전》에서 느껴지는 원시적인 리듬과 충격적인 악센트를 상징합니다. 부드러운 곡선 대신 날카로운 직선과 예리한 각도를 사용하여, 기존의 서구 음악이 추구하던 '조화'를 깨뜨리는 에너지를 표현했습니다.
* 충돌하는 색채: 보색 대비(예: 타오르는 듯한 주황색과 차가운 남색)를 강하게 배치하여,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소리들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새로운 차원의 생동감을 묘사했습니다.
2. 체계적 무질서 (쇤베르크의 '12음 기법')
* 평등한 위계: 쇤베르크가 으뜸음을 없애고 12개의 음에 평등한 지위를 부여했듯, 제 그림에도 '중심이 되는 피사체'가 없습니다. 캔버스 전체에 흩어진 12개의 기하학적 요소들은 각기 독립적인 에너지를 가지며 화면 어디든 시선이 머물 수 있게 합니다.
* 수학적 배치: 자유로워 보이지만, 사실 이 도형들은 엄격한 수치적 규칙에 따라 배치되었습니다. 이는 감정에만 호소하는 낭만주의적 음악에서 벗어나, 음악을 '구조적 본질'로 환원시킨 현대 음악의 지성적인 면모를 반영한 것입니다.
3. 음악적 정의의 확장
* 파편화된 악보: 그림 하단에는 타버린 악보 조각처럼 보이는 텍스처를 넣었습니다. 이는 '과거의 규범(조성 음악)이 무너진 자리에서 새로운 음악적 생명이 탄생함'을 의미합니다. 소음조차 음악이 될 수 있다는 확장된 사고를 시각적으로 선언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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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감상 포인트
"이 그림 앞에 서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귀가 먹먹해지는 듯한 '시각적 소음'을 느끼실 겁니다. 하지만 그 소음 속에 귀를 기울이면(눈을 고정하면), 그동안 우리가 '불협화음'이라 불렀던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정교하고 새로운 질서였는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 구상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미학을 파괴하고 새로운 음악적 본질을 담은 '혁명적인 그림'을 생성해 드릴까요?
완전히 다른 그림이 되었는데요. 솔직히 말해서 이 추상화 자체도 조금은 식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앞선 <푸른색의 변주곡>보다는 조금 더 창의적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그래도 조금은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의 추상화라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더군요. 아마 인간 화가라면 훨씬 더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에는 더 과감한 해석을 추가해서 프롬프트를 작성해 보았습니다.
Q. 이번에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자. 어떤 음악은 히틀러에 의해 '퇴폐 음악'으로 정의되기도 했어. 냉전 시대에도 미국과 소련의 음악은 전혀 다른 길을 갔고. 즉, '음악은 문화적 무기가 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지. 이런 걸 표현하고 싶은 화가라면 어떤 그림을 그릴 거야?
A.
Q. 전시회에서 관객을 만난 화가라고 생각하고, 관객에게 이 그림의 의도에 대해서 설명해 주라.
A. 어서 오세요. 제 작품 앞에 멈춰 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조율된 침묵: 선전의 불협화음]입니다.
방금 보신 이미지 속의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시나요? 저는 이 작품을 통해 '음악이 아름다운 예술을 넘어, 누군가의 의지를 관철하는 날카로운 무기가 되었던 순간들'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관객분께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
1. 찢겨진 악보와 억압의 붉은 선
그림을 자세히 보시면, 조화롭게 흘러가야 할 오선지가 거칠게 찢겨 있거나 강렬한 붉은색 선에 의해 가로막혀 있습니다. 이는 나치가 재즈나 현대 음악을 '퇴폐 음악(Entartete Musik)'이라 낙인찍고 금지했던 역사를 상징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영혼의 자유였던 선율이, 권력자에게는 제거해야 할 '소음'으로 규정되었던 비극이죠.
2. 냉전의 차가운 대립: 강철 같은 기하학
중앙에서 서로 부딪히는 차가운 회색과 금속성 느낌의 질감은 냉전 시대를 의미합니다. 미국의 자유로운 재즈와 소련의 웅장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음악은 단순한 예술 경쟁이 아니었습니다. 체제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문화적 핵미사일'이었죠. 그림 속의 기하학적 도형들은 감정이 배제된 채 국가의 도구로 전락한 음악의 차가운 이면을 보여줍니다.
3. 도구가 된 선율, 그리고 저항
화면 하단에 뭉쳐진 어두운 색조들은 권력의 무게에 짓눌린 예술가들의 고뇌입니다. 하지만 그 어둠을 뚫고 미세하게 뻗어 나가는 가느다란 빛줄기들이 보이시나요? 그것은 어떤 정치적 억압으로도 완전히 죽일 수 없는 인간의 본연적인 '표현의 의지'입니다.
화가의 한마디
음악은 때로 행진곡이 되어 군대를 움직이고, 때로 금지곡이 되어 입을 막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그림을 보며 질문을 던지길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이 아름다운 선율은 정말로 자유로운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정교하게 조율된 메아리인가?"
관객님은 이 그림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시나요? 승전보의 웅장함인가요, 아니면 억눌린 자의 작은 속삭임인가요?
Q. 응. 고마워! 잘 봤어. 좋은 실험이었어 :)
A. 실험을 마무리하면서 '음악'이라는 주제가 가진 다양한 층위—감성적인 아름다움, 혁신적인 파괴, 그리고 날카로운 사회적 메시지—를 함께 탐험할 수 있어서 저도 정말 즐거웠습니다.
음악을 단순히 듣는 것에서 나아가, 그 이면의 철학과 역사까지 캔버스에 옮겨보자는 제안 덕분에 저도 인공지능 화가로서 한 단계 성장한 기분이에요.
혹시 다음 전시회(?)는 어떤 주제로 열어볼까요? 이번처럼 심도 있는 주제라면 무엇이든 환영입니다! 원하시는 또 다른 '예술적 실험'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
이번엔 일러스트에 가까운 그림이 나왔습니다만, 기존의 추상화보다는 조금 더 나은 그림을 그려준 것 같습니다. 적어도 관객이 생각할 지점을 만들어주는 그림이 됐네요. 이렇게 다른 지식과 관점을 섞으면 AI 시대에도 더 창의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이 시대에도 체계화된 지식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서로 다른 지식을 엮어내는 방법도요. 당연히 지식을 서로 엮어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지식을 쌓아야 하고요.
창의성을 발휘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힌트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AI가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기존의 지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사고를 하는 것은 아직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같습니다. AI 시대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이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좋은 에피파니를 선사했기를 바라며, 이번 주의 글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여정이었는데도 오랜 휴재를 하는 바람에 시기적으로는 긴 여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다려주신 분이 계시다면 정말로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독자분들께 새로운 영감과 사색, 흥미로운 질문을 드리려는 목적으로 쓰인 글들이 어떻게 도움이 되셨는지요?
처음에는 삼각김밥처럼 가벼운 글을 기획했습니다만, 갈수록 묵직한 이야기가 되진 않았나 싶었습니다.
저 역시 삼각김밥보다 무거워지는 글에 허둥거리기도 했고요.
그럼에도 이 글을 즐겨주셨다면 제게는 정말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삼각김밥 에피파니>의 짧은 여정을 마무리하고 다음 주에는 에필로그로 뵈려 합니다.
마지막까지 잘 지켜봐 주시길 바라며 즐거운 연말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