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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김 Apr 20. 2021

밤 산책

공허하게 멍하니

요즘은 날씨가 좋아서 밤 산책을 자주 한다.

습한 여름이나 눈 쌓인 겨울에는 자주 하지 않는 활동 중 하나이다. 요즘처럼 밤에 조금 쌀쌀한 정도면 밤 산책을 하기 좋다. 바람이 불어도 그렇게 칼바람은 아닌 요즘은 정말 밤 산책하기 좋은 계절이다. 하긴 봄인데 무엇인들 하기 좋지 않을까.


어두운 거리에 주황색 불이 켜진 골목길은 걷기 호젓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고, 조금은 멍하니 걸어도 되고. 걷는 동안은 멍하니 생각에 몰두하곤 한다. 낮에 있었던 일이나 괜한 앞날의 걱정이나, 뭐 그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들이 주로 떠오른다. 그러다가도 이랬으면 좋았을 걸, 저랬으면 좋았을 걸 하고 공연한 후회도 머릿속을 맴돌곤 한다. 딱히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발전적인 생각 대신 후회나 회상 같은 것이 머릿속을 채우곤 한다.


그래도 딱히 마음이 괴롭거나 복잡하지 않다. 물론, 어쩔 수 없이 복잡한 날도 있지만 대체로 산책을 하는 동안은 가라앉는 느낌이 좋다. 돌아다니는 골목길은 다소 복잡하지만 마음은 그냥 가만히 켜져 있는 가로등 마냥 의식만 존재하는 것 같다. 요즘은 그렇게 한 밤 중에 붕 떠있는 듯한 느낌이 좋다. 아무래도 마음 한 켠이 복잡한 모양이다.


10시가 넘은 한 밤 중에 돌아다닐 때는 거리도 고요하고 드문드문 나타나는 술집에만 사람이 있다. 분위기 있는 술집에 들러 뭐라도 한 잔 해야 할 것 같지만, 다음 날을 생각해서 언제나 늘 그냥 지나치곤 한다. 그러고 나면 평소보다 조용한 골목이 술집의 소란스러움과 괜히 겹쳐 들리곤 한다. 세상에는 소리가 흘러넘치는 곳도 있고 이렇게 조용한 곳도 있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생각을 하면서.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도 무언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시간이다. 특히 요즘 전기차 지나가는 소리는 빠져들곤 한다. 진짜 엔진음 대신 다른 소리를 넣어둔 모양인데 그런 것도 신기하다.


이제 많이 지긴 했지만, 가로등에 비친 벚꽃도 한참을 감상했다. 꽃도 아름다운데 어둠 속에 핀 꽃은 왜 더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그림자마저 꽃인 존재가 기분을 산뜻하게 해 준다. 후회와 회상이 가득한 머릿속에도 잠시나마 감사함이 스쳐 지나간다. 밤바람에 날리는 벚꽃잎은 어둠 속에서 보면 봄의 따스함이 보이는 것 같다. 공연히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기분이 든다.


9시 이전에 나왔다면 카페에 들를 수 있다. 가로등만 켜져 있는 거리를 걷다가 실내로 들어가면 조도가 달라진다. 거의 문을 닫을 시간이라 여유 있는 카페에서 커피가 아닌 음료를 주문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다시 멍하니 앉아있는다. 이런 순간순간의 멍함이 참 좋다. 복잡한 생각 말고 오롯이 내가 느끼는 그대로인 시간이 소중하다. 음료가 더 천천히 나왔으면 하고 바랄 때도 있다.


음료를 들고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늘 아쉽다. 돌아다닐 수 있는 동네가 더 커졌으면 좋겠고, 다시 생활하는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기분만 계속해서 든다. 코로나만 아니면 여행이라도 떠날 텐데 하는 생각에 한숨을 쉬곤 한다. 어지간히 나도 생활에 짓눌려있나 보다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한다. 산책 내내 떠올랐던 후회와 회상은 간데없이 그렇게 밤 산책은 끝이 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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