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아만 놓는 책들
"츤도쿠"라는 말이 있다.
일본어로 積ん読 라고 쓰는데, 한자 그대로 읽으면 쌓을 적(積) 자를 쓰니 '적독'이 될 것이다.
뜻은 책을 쌓아놓기만 하고 읽지 않는 행동을 말한다.
부정적인 어감만 있는 것은 아닌데, 책을 쌓는다는 행위 자체도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읽지도 않으면서 책만 쌓는다니 보기에 따라서는 일종의 수집벽이나 과시용, 혹은 의욕만 앞서는 행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도 책을 쌓아두기만 하는 행동이 나름의 의미와 운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책을 직접 구입하여 쌓아 둘 때마다 부담감과 소유욕이 충족되는 것을 동시에 느낀다. 언제 읽지 하는 부담감은 늘 나를 짓누르고, 동시에 그 자체로도 훌륭한 소품이 되는 책이 만족스럽기도 하다. 가치 있는 책이라면 더욱 소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이 허영심이나 수집벽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쌓아둔 책은 읽고 싶다는 욕구보다 바쁜 현실에 치여 등한시되기 일쑤다. 책 한 권 쓰는 일이 무척 힘이 드는 일일 텐데도, 세상에는 자꾸만 읽고 싶은 책이 나오고 그것을 여유롭게 읽을 시간은 점점 없어지는 느낌이다. 핑계일 수도 있지만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날이 더 많다. 그래도 독서광 중에는 흔히 있는 유형인 것 같아서 안도하며 마음을 쓸어내릴 때가 많다. 김영하 작가도 말하지 않았는가. 읽을 책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거라고.
그렇다면 책을 쌓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책의 표지와 모양, 레이아웃에서 느끼는 미적 쾌감과 그리고 책 안의 내용을 오롯이 소유한다는 것은 책을 소중히 여기는 행동이다. 책을 한 권 한 권 정리할 때의 아날로그적인 행동도 마음을 따듯하게 해 줄 때가 있다. 다 읽지는 못하더라도 한 장 한 장 넘기며 정독을 할 때, 무언가에 집중한다는 것만으로도 복잡한 현실에서 벗어나 한껏 휴식을 취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집 한 켠이 아직 읽을 수 있는 책으로 가득하다는 것은 아직 모험할 수 있는 세상으로 가득한 것 같아 설렐 때도 있다. 책을 쌓아 놓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변해간다고 했듯이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무언가를 읽고 쓰게 만든다. 활자가 주는 매력과 종이가 쌓여있는 풍경도 책이라는 세상에 빠져들 수밖에 없게 한다.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적절한 동기부여가 되어 준다. 책을 쌓아두면 어쩔 수 없이 독서를 하게 된달까.
현실적인 작은 핑계라도 늘어놓자면, 자그마한 우리나라의 출판 시장의 사정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쉽게 베스트셀러 순위도 바꿀 수 있는 작은 시장이니 조금이라도 더 가치 있는 책에 투자하고 싶다. 아직 우리나라는 가치 있는 책이 빛을 보기가 너무 어려워 보인다. 베스트셀러보다는 손이 잘 가지 않는 깊이 있고 가치 있는 책들이 많은데, 이런 책들이 계속해서 나오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많은 독서 인구와 구매력이 필요하다. 미미하지만 이런 현실에 보탬이 되기 위해 책을 사서 모은다고 의미부여를 해본다.
그 밖의 이유라 봐야 그저 책을 사 모으는 것이 좋다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가득 쌓아두고 싶은 것은 당연한 심리 아닌가. 책이 가득 쌓여있는 공간에 파묻히고 싶은 것도 나름 멋진 일이라고 허영을 부려본다. 공간이 많이 필요하고 쓸데없이 돈이 나가는 일이 생기지만, 책이 있는 정경도 꽤 운치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