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 생각들이 색깔이라면
머릿속 생각들이 온통 색깔이라면, 머릿속을 하얀색만으로 채우고 싶은 날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캔버스처럼 머리도 한 번 그렇게 깨끗하게 만들고 싶다. 온갖 알림과 갑자기 터지는 일들, 아니면 막다른 길에 몰린 듯한 날들 모두 머릿속이 그렇게 혼탁해진다. 빨강, 주황, 초록, 파랑 각종 색깔이 섞여서 결국 머릿속은 온통 난리가 난다. 결국에는 각종 생각이 섞여서 회색이 되어버리는 때도 종종 있다. 아니면 색깔들이 자기 목소리가 크다고 종일 떠들거나. 그런 날이 지속되면 모든 것을 구겨서 버리고 머릿속을 흰색으로 채우고 싶어 진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 색깔들을 통제하기가 버겁다. 현실은 무겁기만 하고 중요한 것들은 너무 많아 보인다. 현실은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색깔들만 퍼붓고, 잘하고 싶다는 욕심도 끊임없이 색깔들을 부어 넣는다. 잠시라도 쉬지 않는다면 색이 넘쳐나서 머릿속이 엉망이 될 것 같다. 왜 이렇게 세상은 복잡하기만 한 건지.
이런 날에는 읽던 책도 놓고, 핸드폰도 놓고, 그냥 누워버리기 일쑤이다. 어떨 때는 음악도 듣지 않는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어떤 자극도 거부하고 싶어 진다. 이런 날은 멍 때리는 것이 최고다. 가만히 생각들이 떠들도록 내버려 두다가 제 풀에 지쳐서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주어야 한다. 시간 만이 색깔들을 조용히 시킬 수 있다.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내 시간은 이런 머릿속을 차분하게 해 준다. 때로는 미쳐버릴 것처럼 복잡한 머리 속도 조용해진다. 복잡할수록 이런 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가만히 있을 수 있는 나의 시간. 가만히 머릿속을 하나 둘 비워나가다 보면, 점차 하얀 캔버스가 드러나고, 각종 색깔들은 물감통 속으로 하나 둘 들어가 버린 것처럼 정리된다. 회색으로만 보였던 기분도 자신감도 점차 나아져서 하얗게 빛나기 시작한다. 머릿속은 이렇게 하얀 캔버스 같을수록 잘 동작하는 것 같다.
일상이 복잡할 때, 공부를 아주 많이 해야 할 때, 힘이 들고 괴로울 때는 하던 일을 내려놓아야 한다. 나에게는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럴 때 들어야 하는 음악이 무엇인지, 아니면 듣지 말아야 하는지, 그럴 때 어디에 숨어있어야 하는지, 어느 시간이 가장 조용한지 등 마음속에 나만의 도구를 쌓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쌓은 나만의 도구가 무슨 색인지도 알 수 없는 얼룩덜룩한 나를 구해준다.
뇌 전문가는 아니지만 가만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머릿속에도 감정에도 좋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멍 때리거나 가만히 음악만 듣거나 아니면 달리는 버스 안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있거나 하는 시간들이 결코 낭비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시간들이 나를 지키는 토대가 되어준다. 그러니 힘들고 괴로우면 얼마든지 도망가자. 다시 돌아왔을 때 맞설 준비가 되어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때 정리된 나의 색깔들이 그제야 제 빛을 내면서 머릿속 캔버스에 화려한 그림을 그린다. 그러니 초조하고 괴로워도 색깔을 조용하게 만들 시간을 찾아서 기다려보자. 나에게는 분명히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