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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과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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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김 Dec 18. 2021

독서도 밖에서 하는 게 맛있다

외출해서 읽는 책의 맛


어린 시절보다는 덜 하지만 나는 책을 종종 들고 다닌다. 이동 시간이 길거나 하루 이상의 여행을 가게 되면 항상 책을 들고나간다. 책이 무겁고 번거롭긴 해도 오래된 내 작은 습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그마한 핸드폰과 달리 책은 크기도 무게도 제법 있는 데다가 흔들리는 대중교통에서 중심을 잡으며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이건만, 그런 소소한 불편함이 있더라도 이동하면서 책을 읽는 것을 포기하기가 어렵다. 집에서 읽는 책과 밖에서 읽는 책은 어쩐지 그 느낌이 다르기 때문이다.


버스나 비행기에서 책을 읽는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버스나 비행기에 오르면 가만히 창 밖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일상을 떠나는 설렘이 가득하다. 어딘가로 열심히 달려 나가는 느낌이 일상을 잊어버리게 해 준다. 그때, 책 속의 세계에 빠져들면 이미 멀어진 일상에서 더 멀어질 수 있다. 일상과 더 확실하게 분리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까. 그래서인지 이동하면서 책을 읽으면 내용에 더 깊이 빠져들곤 한다. 그러다 보면 여행이 훨씬 즐거워지고 독서도 훨씬 맛깔난다. 속이 더 시원해지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앞서 말했듯 불편한 점이 없지는 않다. 대중교통에서 책을 읽을 때는 멀미가 나곤 한다. 나는 지하철에서는 멀미를 잘하지 않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는 버스를 타다가 간혹 멀미를 하곤 한다. 그럴 때는 가능하다면 창가 자리에 앉아서 자주 바깥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또는 글씨가 좀 큰 책을 가져가면 좀 낫다. 전자책을 가져가서 큰 글씨로 읽는 것도 방법이다. 게다가 전자책은 터널에 들어갈 때 갑자기 조도가 바뀌는 것도 대응할 수도 있다. 이렇게까지 책을 읽어야 하냐고? 밖에서 독서하는 상쾌한 기분을 포기할 수 없어서 다소의 멀미는 감수한다고 할 수밖에. 미련하다는 건 인정해야겠다.


코로나 이전에는 비행기를 탈 일이 있으면 반드시 책을 들고나갔다. 미국에 갔을 때는 책을 두 권을 챙겨서 비행기 안에서 읽었다. 비행기를 타는 동안 밤이 길어서 다 읽지는 못했지만, 비행기 안에서 아무 방해 없이 책을 읽는 시간은 무척 즐거웠다. 비행기 안은 정말로 독서하기 좋은 공간이다. 요즘은 다르겠지만 핸드폰이 터지지 않아서 집중하기가 좋다. 좌석도 독서하기에 적절하다. 좋은 소파를 가져다 놓은 것처럼 의자에 푹 파묻히면 금방 책 속으로 빠져든다. 난기류만 없으면 버스나 지하철처럼 흔들리지도 않고 멀미도 잘하지 않는다. 버스에서는 바깥의 풍경이 계속해서 변하니 가끔 창 밖에 시선을 둘 때도 있지만, 비행기에서는 하늘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가만히 책에 눈을 두고 있으면 된다. 무엇보다 아주 먼 곳으로 떠난다는 설렘이 최대치다. 집 밖에서 하는 독서 중에서는 비행기에서 하는 독서가 가장 짜릿하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비행기에서 책을 읽을 때는 밤이 문제다. 비행기 안에는 독서등이 있어서 독서등 켜는 법만 알면 밤이라 해도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이코노미 석에서는 다른 사람의 수면을 방해할 수 있어서 꺼야 할 때도 있다. 종이책을 좋아하는 분에게는 아쉬운 일이다. 비행기 안에서는 음악도 들을 겸 태블릿 PC를 이용하거나 전자책을 사용하는 편이 나은 것 같다. 언제나 모든 해결책은 돈이라고 비즈니스 석을 끊는 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겠다.






어릴 때는 어른이 된 지금보다 더 먼 길을 갈 일이 자주 있었다. 회사만 왔다가는 지금보다 체험학습이나 수학여행을 가는 일이 계절마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책이나 일기장을 챙겨갔는데, 버스 안에서 글이나 쓰고 책이나 하루 종일 읽고 있으니 친구들에게 핀잔을 듣곤 했다. 어릴 때는 지금보다 꿋꿋하게 책을 읽으면서 여행을 했다. 참 시끄러운 초 중 고등학생들에게 둘러싸여서 정신없는 즐거운 분위기에도 책을 읽었으니 어린 시절의 나는 정말 하고 싶은 건 다 하는 성격이었나 보다. 어른이 된 나는 지하철을 타도 눈치가 보여 조심스레 책을 읽는데 말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 체험학습을 가는 날이었다. 그날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가져갔다. 조그마한 판형에 표지도 예쁜 책이었는데, 가방에 넣어가기에 무척 가뿐했다. 갈 때는 별 문제가 없이 책을 읽으며 체험학습을 하러 갔다. 하지만 올 때가 문제였다. 체험학습을 간 곳은 하필 갯벌이었다. 갈 때는 책을 읽으면서 갔는데 올 때는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갯벌에서 놀고 난 다음에는 아무리 씻어도 손에 진흙이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흙 범벅이 된 손으로는 책을 읽을 수가 없어 배낭에 책을 넣어놓았다.


하지만 그게 큰 실수였다. 갯벌에 갔으니 페트병에 잡아온 작은 게와 바다 생물들을 진흙과 함께 넣어 가져왔다. 갯벌 보호 차원에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벌이라도 받은 듯이 페트병이 가방 안에서 열려서 책이 망가졌다. 아마도 페트병을 덜 닫은 모양이었다. 가방이 난리가 났는데도 다른 것보다 책이 망가진 것이 너무 아쉽고 서러웠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책은 말려서 읽었다. 진흙에 젖은 책이라 페이지마다 진흙물이 들어서 얼룩덜룩했고 서로 달라붙어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떼어서 읽어야 했다. 






그 밖에도 가끔 책을 가지고 다니느라 책을 망친 일이 있었다. 차가운 음료를 책과 함께 집어넣고 다니다가 음료 표면에 물방울이 생겨서 책이 젖은 적도 있다. 멀리 떠나는 길에는 책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느라 무거워서 고생하기도 했다. 책에 메모를 하거나 밑줄을 치기도 어려우니 밖에서 독서하는 건 참으로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다. 그래도 책 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어딘가 아까운 기분이 든다. 이동 시간은 다른 일을 잊을 수 있는 아무 일정도 없는 시간이다. 해야 하는 일도 없어 작은 시간이나마 온전히 책 속에 빠져들 수 있다. 마치 작은 간식을 먹는 듯이 맛있는 그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기는 아깝다. 


집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서 편안하게 하는 독서도 무척 즐겁고 항상 그러고 싶을 만큼 행복하다. 그래도 아쉬운 부분에서 책을 덮어야 할지도 모르는 밖에서 하는 독서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 바쁜 일상에 타협하듯이 쫓기면서 하는 독서라도 좋고 반대로 바쁜 일상을 떠나보내며 여유를 펼치는 독서라도 좋다. 어쩐지 그런 시간 속에서 하는 독서는 책 속의 세계가 더욱 실감이 나는, 모험을 떠나는 듯한 약간의 스릴과 설렘이 공존한다. 책을 들고 돌아다니자면 다소 무겁기는 해도 모험을 떠날 든든한 준비를 마친 듯한 기분도 든다. 그렇게까지 거창한 여행은 아니더라도 내 정신을 어딘가로 빼앗아줄 즐거운 흥분감이 슬며시 들곤 한다.


요즘은 코로나가 심해서 어디 나갈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아무래도 코로나가 길어지나 보니 여행을 떠나본 것도 무척 오래된 것 같다. 어서 일상을 되찾아 훌쩍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 들고 다니기 적당한 책을 두어 권 가방에 넣고 어딘가로 떠나면 행복할 것 같다. 비행기를 타고 푸른 하늘을 독서등 삼아 가만히 책에만 시선을 두고 싶다. 탈 수 있는 날이 올진 모르겠지만 비즈니스 석에서 독서하는 것은 어떤 기분일지도 궁금하다. 마치 독서하기 위해서 음식이 서빙되고 담요가 나온다고 생각하면 정말 최상의 독서환경일 텐데 말이다. 뭐, 꼭 비즈니스석은 아니더라도 다시 여행을 갈 수 있을 때까지는 꼼짝없이 집에서 따뜻한 방바닥을 뒹굴며 책을 읽어야겠다.



Photo by Max Delsid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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