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과 레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삼김 Jan 15. 2022

책이 풍요로운 시대

책에 대한 강박관념

나는 80년대생이다.

빈곤하던 시절의 가난을 겪지 않은 세대다. 내 부모님 세대에서는 시대적이고 절대적인 빈곤을 겪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가난한 시절의 영향은 내 부모님 세대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지 나는 가난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쌀이 남아돌아 쌀값을 걱정하는 시대에 살아도 여전히 쌀 한 톨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고 밥을 남기면 북한이나 소말리아에서는 어린이들이 굶고 있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음식을 쉽게 버리지 못하던 시절의 교훈이 그렇게 전해져 내려왔다.


아마도 그 시대에는 책도 귀하지 않았을까.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이니 당연히 책도 귀했을 것이다. 학교도 아무나 갈 수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고 하니 아마 책을 손쉽게 만질 수 있는 사람들도 한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출판되는 책의 종류 수도 적었을 테고, 지금처럼 인쇄기술이 발달하지도 않았을 테니 출판 자체도 어려웠을 것이다. 책 한 권을 출판하려면 책이 정말 팔릴지, 내용이 충실한지 무척 신중하게 따져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어릴 때부터 책을 무척 귀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다. 책을 깨끗하게 보는 것은 물론이고 책의 내용도 무척 귀한 것으로 여겨졌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고, 책을 통해서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어왔다. 또한 책이 품고 있는 정보는 다른 정보보다 훨씬 신뢰성이 높은 정보로 여겨졌다.


그러다 보니 나는 자라면서 책에 밑줄을 절대 긋지 않았다. 책을 상하게 하면 안 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또한 끝까지 읽지 않으면 배움의 과정을 중간에 포기한 듯한 기분이 들어서 한 번 읽기 시작한 책은 반드시 끝까지 읽었다. 책에서 본 내용을 꼭 기억하려 했고, 그 내용을 다소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책이 귀하던 시대였다면 정말 괜찮은 습관이었을 것이다. 귀한 책이니 당연히 깨끗이 읽어야 했을 테고 아까워서라도 끝까지 읽는 편이 맞는 습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느 정도 이 습관을 고쳤다. 다독가들의 습관을 접하고 보니 그동안의 내 습관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이라는 웹툰에서는(책으로도 출판되었다) 다독가들의 독서 습관이 묘사되어 있다. 신기하게도 다독가들은 이 오래된 습관을 거슬러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독서를 한다. 책에 밑줄을 엄청 긋는다거나 메모를 하기도 하고 책 끝을 접기도 하며 심지어 책을 끝까지 완독하지도 않는다. 왜 이런 독서를 하는 걸까?


아무래도 독서를 더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아닐까?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다 보면 책과 더 활발하게 대화를 하게 된다. 무엇보다 지금은 책이 귀한 세상도 아니고 오히려 책이 팔리지 않아 폐지로 돌아가는 시대이니 그렇게 적극적으로 필기를 한다 해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책을 다시 구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다독가들의 습관 중 재미있는 것은 완독을 하는 대신 여러 책을 한꺼번에 읽는 습관이었다. 그야말로 책이 풍요로운 시대에서나 할 수 있는 독서라고 볼 수 있다. 책을 여러 권 갖춰 놓기 쉬운 시대에 그만큼 책을 좋아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독서법이 아닐까 싶다. 완독을 하지 않는 이유도 독특하다. 다독가들이 완독에 집착하지 않는 이유는 말 그대로 집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다독가들은 재미가 없는 책이라면 언제든지 자유롭게 그만두고 넘어간다. 다른 책을 읽다가 다시 넘어오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여러 책을 한꺼번에 읽는다(병렬 독서라고도 한다). 그야말로 여러 책에 푹 빠져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많은 책을 동시에 읽을 정도로 몰입할 여유가 있을까?


다독가들은 아무래도 책을 많이 읽는 만큼 책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책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특정 출판사를 알아보기도 하며 책의 제본 방식까지도 어느 정도 구분한다. 아무래도 책에 대한 안목이 높다 보니 되도록 좋은 책을 선택을 하고 나쁜 책은 멀리하기도 한다. 그만큼 다독가들은 책을 적극적으로 비판한다. 책에 나온 내용이라고 비판 없이 수용하는 일이 적다. 특히 요즘처럼 출판물이 쏟아지는 시대에는 신뢰하기 어려운 책도 나오기 때문에 이렇게 비판하는 능력이 중요해 보인다.






이렇게 다독가들의 습관을 살펴보니 그동안 나의 독서 습관은 책이 없던 시절의 습관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소중히 여긴 나머지 일종의 강박관념처럼 책을 깨끗이 하고 반드시 완독을 해야 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 시절의 강박관념을 내려놓고 나면 밑줄을 치면서 적극적으로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완독하는 대신 책을 쌓아놓고 여러 권을 동시에 읽을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책을 비교하면서 읽게 되고 비판하는 능력도 생기지 않을까.


이제는 온라인에서 쉽게 책을 구할 수 있고 출판되는 책의 종류도 어마어마하게 많아졌다. 그에 맞춰서 책 읽는 습관도 바뀔 필요가 있어 보인다. 책을 귀하게 여기기보다는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며 충분히 깊이 있게 읽는 방식으로 말이다. 특히 요즘에는 여러 종류의 책이 쏟아지는 만큼 검증되지 않은 내용이나 어설픈 내용의 책들도 시장에 나와있다. 따라서 책을 귀한 것으로 여겨 무작정 신뢰하기보다 충분히 비판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다. 또한 책이 풍요로운 시대이니만큼 완독보다는 여러 책을 읽으면서 독서 생활을 즐기는 것도 좋아 보인다. 식습관도 시대에 맞추어 바뀌어 왔듯이 독서 습관도 바뀌어 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Photo by Gülfer ERGİN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동네 서점에는 인연 있는 책이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