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쉴 수 있는 그 자리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 때도 나는 꼬박꼬박 책을 읽고 있었다. 학교에 붙잡혀 있지 않은 시간에는 집 구석에서 책을 읽곤 했다. 이과였던 나는 그 당시에도 과학교양서를 자주 읽었다. 언젠가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기에 책을 읽을 때마다 항상 나의 꿈을 곱씹곤 했다. 독후감도 가끔 쓰면서 독서를 꽤 즐겼다. 아무래도 시험 공부 빼고는 다 즐거운 때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 당시의 독서는 지금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때 읽었던 책은 지금도 내 책장에 꽂혀 있다.
하지만 나는 즐겁게 책을 읽던 내 소소한 취미를 스스로 포기했다. 아무래도 고3이 다가오면서 공부에 대한 압박이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시험에 대한 압박을 심하게 느꼈고 책을 읽는 시간이 무척 부담스러워졌다. 당장 공부를 해야하는데 이렇게 즐거워도 되나 하는 죄책감 비스무리한 감정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제집이나 교과서 외의 책을 내려놓고 공부에만 몰두하기로 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잘 되었으면 좋았으련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과학교양서를 보며 꿈을 키우던 시간이 사라지니 동기부여도 잘 되지 않았고, 특별히 스트레스 푸는 시간이 없으니 스트레스 관리가 더욱 어려워진 것도 물론이었다. 나는 공부 대신 딴 생각을 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정서적으로도 답답함과 괴로움을 느끼며 지쳐갔다. 성적이 나빠진 건 물론이다.
그 때의 경험 이후로는 책을 일부러 멀리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내가 좋아하는 주제의 가벼운 책을 팔랑팔랑 넘기며 시간을 보낸다. 책이 안내하는 다른 세상으로의 몰입이 꽤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때문이다. 책에 푹 빠지게 되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렇게 몰입해서 읽고 나면 기분도 뿌듯해진다. 좋은 책이 주는 지적인 경험과 지식들은 보너스다.
그렇게 책을 읽는 건 즐겁지만 살면서 항상 책만 읽기는 어렵다. 그야말로 살기 바빠서 책을 읽을 수 없을 때도 많다. 기쁠 때는 기뻐서, 슬플 때는 슬퍼서 책을 읽지 않는다. 어쩌다 한숨을 돌릴 때만 책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펼쳐놓고 읽을 뿐이다. 바쁜 생활의 한가운데서 가끔 책이 있는 구석으로 돌아와 쉬어가는 셈이다.
책은 항상 변하지 않고 나를 기다려준다. 한 번 산 책은 항상 그 자리를 묵묵하게 지키며 내가 쉬어갈 수 있도록 기다려준다. 사람도 변해가고 인연도 모였다 흩어지곤 하지만 항상 책만큼은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린다. 나는 그저 바쁜 삶을 헤매다가 쉬고 싶을 때 책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쉬어가는 것만을 반복한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서문에 나오는 문장이다. 책에 관한 명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참 위로가 되는 말이다. 책이 있는 방 하나만 있다면, 언제가 되든 어디에 있든 쉴 수 있다. 지치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는 세상, 그저 이렇게 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책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쉬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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