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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은 Oct 13. 2020

‘느닷’ 없인 만나지 못했을 P

2018년 4월엔 부암동에 카페 ‘느닷’이 있었다. 느닷에서 걸어서 2분 거리에는 치킨집 '계열사'가 있었다. 서울 3대 치킨집에 이름을 올린 곳. (지금도 있다.)


4월 끄트머리 어느 날 Y와 치킨을 먹으러 계열사로 향했다. 며칠 전 친구들과 먹은 이곳 치킨 맛을 애인에게도 공유하고 싶어서 이번 주만 두 번 찾은 치킨집. 아침저녁으론 살짝 차갑지만 낮이 되면 기온이 꽤 올라가던 그때 날씨, 동네의 풀 냄새를 기억한다. 리모델링 후인 지금과 달리 좀 허름했던 계열사는 주말 저녁엔 적어도 30분 이상 기다려야 테이블을 안내받을 수 있었다. 후라이드 한 마리 2만 원, 좋아하는 골뱅이 소면은 양이 작은 게 2만 3천 원(큰 건 3만 원)이어서, 두 명이 가도 세 명이 가도 나는 고민만 하다가 '치맥'만 시키던 가성비는 별로인 치킨 가게.


대기 명단에 이름을 쓰려고 펜을 든 사람은 나였는데, 웃기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래서 Y의 이름을 이름칸 위아래 양옆이 꽉 찰 정도로 크게 그려 넣었다. 다음 칸부터 이름을 쓰는 사람은 누구든 Y의 이름에 절로 가는 눈길을 막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대기줄 긴 잘난 치킨집 덕에 우린 식전 산책을 할 시간도 생겼다. 주변을 걷다가 치킨집 앞으로 되돌아와 혹시라도 우리를 호명하는 소릴 못 들을까 문 근방에 서 있는데, 치킨집 사람이 아닌 누군가가 Y를 불렀다.


"ㅇㅇㅇ...?"


소리를 낸 쪽엔 흑색 커트머리를 한 또래 여성이 있었다.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몸, 오밀조밀한 인상의 그녀가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Y의 이름을 그리며 기대한 건 이런 일이었을까?'


뜻밖의 반가움이 담긴 표정으로 그녀가 Y와 인사를 나눴다. 존댓말로 근황을 나누는 그들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니 그녀는 디자이너였다. 6-7년 전 Y와 함께 일할 뻔했는데 사정이 생겨 외국으로 나간 후로 그녀가 Y와 다시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다 내 덕분이다. 예상대로 대기 명단에 이름을 적던 그녀는 시선을 잡아 끄는 너무나도 커다란 Y의 이름을 발견하고 '그 Y'가 맞나 싶어 이름을 불러 본 것이다.


“아니, 이름이 너무 크게 써 있어서~. Y가 맞나 하고 불러봤어요. 어머, 이렇게 만나네요!.”


이름이 크게 써 있다는 부분에서 우리 셋은 동시에 웃었고, 나는 바라던대로 그녀를 웃겼다는 생각에 어깨는 잔뜩 승천했다. 그녀는 P였다. 가까운 위치에 자기 카페가 있다고, 그녀는 손가락으로 카페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꼭 놀러 오라고 했다. 계열사에 자주 오는 편은 아닌데 고향 친구들이 궁금해해서 오늘 왔다가 이렇게 만났다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번엔 Y 이름이 확실히 치킨집 사람에게 불려서, P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며칠 전처럼 오늘도 골뱅이 소면 없는 치맥을 주문했다. 우리가 치킨을 먹는 중에 P가 들어왔고, 그녀 일행의 테이블 위에는 치킨과 함께 골뱅이 소면도 놓였다.


치킨으로 저녁을 마친 Y와 나는 소화와 다이어트(?)를 위해 식전에 못다 한 동네 산책을 하다가, P의 카페로 향했다. 그녀가 놀러 오라고 한 말이 바로 당일이어도 되는지 모르지만, 내 지인도 아니고 방금 처음 만난 P지만, 왠지 그녀가 파는 커피맛과 장소가 너무 궁금해서 오늘 당장 P의 카페에 가자고 강력하게 내가 주장했다. Y는 내 주장을 쉽사리 거스르지 못하는 편이니까.


느닷없이 방문하게 된 P의 카페는 '느닷'이었다. 올리브 그린 색의 나무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 선반에 놓인 오래된 타자기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선반이 기댄 벽 오른쪽엔 동네 행사 포스터들이 붙어 있고, 선반 왼쪽으로 한 사람이 지나다니기에 충분한 틈을 두고 1인석 바 자리가 주방과 마주 보고 있었다. 입구 가까운 좌석에 작은 스탠드 하나가 있고 2명 정도면 간격을 두고 앉을 수 있었다. 좌석과 주방 사이를 분할하는 선반 위엔 각종 소품이 저마다 자리 잡았고, 안쪽에 있는 세 개의 테이블 위엔 식물이 담긴 병이 각각 올려져 있고, 그중 가운데 테이블 벽 창틀에 꽂힌 책들은 아주 많진 않았어도 종류가 다양했다. 시, 소설, 수필, 여행 에세이 등. 7평 남짓한 공간 느닷에 없는 것 빼고 다 있었다. P는 지금 식사 중일 것이었다.


Y와 내가 앉은 테이블 옆 자리. 구석 공간이라 안정감 있는 자리였다 _ 2018년 4월 21일


Y와 나는 안쪽 가운데 테이블에 앉았다. 밤에 커피를 마시지 않는 그는 캐모마일 차를,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커피는 충분한 맛과 향이었다. 한 동네에 카페 수가 다섯 손가락, 아니 어떤 동네는 열 손가락을 넘는 일이 다반사인 카페 무한경쟁의 도시 서울에도 맛없는 커피는 언제나 넘쳐나는 것 또한 현실인데 말이다. 맹숭맹숭하거나, 탄맛만 나거나, 오래된 원두의 절은 냄새에 커피잔을 모두 비우지 못하게 하는 액체류들. 느닷의 커피는 맛이 있었다.


커피 마시긴 늦은 밤, 또 카페 문이 또 열리면서 낯익은 얼굴을 보였다. P였다. 친구들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이동하는 사이에 P는 (카페 공동운영자인) 친언니와 가게 마감을 위해 잠시 들른 거 같았다. 두근거렸다. '운명인가.' 우리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P는 환호하며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우리 테이블 커피잔엔 두세 모금의 음료가 남아 있었다.


"커피를 더 줄까요?"


사양해도 그녀는 금세 주방으로 가 디저트 재고를 확인하고 굳이 티라미스 한 조각을 내왔다. 기민한 사람. 우리는 사양한 것도 잊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티라미스에 포크를 찍었다. 디저트 맛의 기대도 함께 올리는 커피 맛을 내는 카페였으므로. 티라미스의 맛은 그 기대치를 압도해 버렸다. 치킨을 먹고 커피도 다 마셔 배가 불렀는데도. P의 언니가 파티쉐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P의 명함을 받았다.명함이 필요한 시대는 아니지만 그 종이는 여전히 쓸모 있었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물건이 되기도, 처음 보는 이와 악수보다 주고받기 좋은 도구가 되기도 하는. P가 명함을 건넨 맥락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이 종이는 그녀 작업의 일부였다. 파스텔 톤의 하늘색 물결이 반짝이는 듯한 이미지가 전면에 깔린 아름다운 종이. 짧은 시간에 우리 사이에 여러 가지로 이야기가 뻗어 나갈 때, 나는 줄곧 그녀는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지 물었다. P는 제품 디자이너이면서 프리랜서이고 카페를 운영하는 사람이다.

카페 느닷 벽 파이프 관에 얹혀 있던 피큐어 사람_ 2018년 4월 21일

P가 카페 마감을 하러 느닷에 온 사실을 내내 염두에 두고 있던 터여서, 접시를 모두 비우고 Y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를 옮긴 친구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P는 재빨리 일어나는 우리보다 더 빨리 출입구 쪽으로 나가더니 뭔가를 재빨리 챙겼다. 느닷의 드립백 커피 두 개를 Y와 내 손에 각각 쥐어주면서 잘 가라고, 또 오라고 인사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도 나는 P의 명함을 다시 한번 보았다. 어느 봄날 우연히 알게 된 P와 동료가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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