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지은 Apr 11. 2021

L의 집에서 밥을 먹었다

L을 처음 만난 지 2주 정도 뒤인 어느 날로 두 번째 약속을 잡았었다. 두 번째 보는 사람의 집에서 점심을 얻어먹게 된 날짜에 맞춰 회사엔 또 하루의 연차를 냈다. 집에서 보기로 했어도 얼마든지 밥이 아니라 차만 마실 수 있지만, L이 점심을 만들어주겠다고 했을 때 사양하지 않았다. 솔직히 신나서 그녀의 수고를 덜어줄 마음을 먹지 않았다. 처음의 대화로 나는 그녀가 요리 활동을 좋아하고, 건강한 요리를 즐긴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L은 마크로비요틱이라는 걸 배웠다. 마크로비요틱이란 단어는 그날 L의 입을 통해 처음 들었찌만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건강한 음식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더욱 L의 집밥이 기대됐다.


그녀에게 미리 필요한 생필품이 있는지 물어봤다. 그녀에게 필요한 세재 한 종과 함께 나눠 먹고 싶은 디저트를 L의 집을 방문하기 전날 새벽 배송으로 주문했다. 그녀와 첫 만남에 나눈 대화 녹취록을 읽어보면서 더 묻고 싶은 질문들을 작성한 문서를 출력했다. L에게도 메일로 공유했다.


L의 집에 가는 날, 옷을 골라 입고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참외 몇 알을 봉다리에 담아 밖으로 나섰다. 이동하는 동안 약간의 긴장감을 풀며 생각했다. ‘무슨 말부터 건네면 좋을까.’ 우린 겨우 두 번째 만나는 사이였다.


구로디지털단지 역에서 내려 개찰구를 빠져나와 마을버스를 타 창문을 조금 열었다. 우리가 수카라에서 처음 만났던 2주 전보다 확실히 덥혀진 공기가 약간 촉촉해진 내 목에 부딪혔다. 코로 바람을 들이마시는데 뜨뜻하고 약간은 텁텁하기까지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점점 가까워지는 L의 집 동네를 살피다가 마침내 버스에서 내렸다. 처음 보이는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을 구매해 참외 봉다리 속에 넣었다. 편의점과 맥주를 따로 떨어뜨려 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어디에 가든 누구를 만나든.


L의 집 건물은 상가들이 즐비한 동네에서 우뚝 솟아 있는 오피스텔이다. 공동 현관 앞에서 그녀의 집 호수와 호출 벨을 누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얼굴을 확인한 L이 문을 열어주었다. 현관문 앞에서 또 한 번 벨을 누르자 L이 앞치마를 두른 채로 문을 활짝 열었다.


"어서 오세요!"


사람보다 냄새가 먼저 문 밖으로 들이닥쳤다. 어떤 재료들이 기름과 열에 튀겨진 듯한 고소할 맛의 향기. 원룸 생활공간을 꽉 채웠다 문을 열자마자 탈출한 참인 듯했다. L의 공간으로 입장했다. 바로 오른쪽이 부엌이고, 두 구짜리 인덕션 위에 작은 스텐 편수 냄비가 올려져 있었다. 냄비 안에는 남은 기름이 담겼고, 바로 옆 조리대 위에는 L이 사용했을 도구들이 겹쳐져 있었다. 고소한 향은 확실히 튀김이었다. 6평 남짓한 공간에 딸린 1인용의 부엌에서 점심 반찬으로 튀김을 한 L이었다. 그때까지 튀김을 직접 해본 적 없는 나에게 그건몹시 '큰일'에 해당하는 노동인데. 요리를 하면 가뜩이나 더워지기 마련인데 튀김, 튀김, 튀김이라니. 에어컨이 가동 중인 방 안이 꽤 더웠다.


"튀김을... 집에서 튀김을 했어요?"


두부와 새우를 튀겼다면서 L은 나를 식탁으로 안내했다. 네 걸음 정도를 걸어 작은 2인 식탁에 앉았다. 튀김 말고도 죽순과 완두콩을 넣고 지은 밥에 감자버섯찌개, 두릅 장아찌, 바질 잎을 얹은 그린빈 토마토 절임볶음까지 플레이트된 그릇이 작은 상을 칠해 놓은 듯이 놓였다. 페스토를 얹은 두부와 새우튀김은 당근 잎 위에 플레이팅했다. 작은 캔맥주와 함께 먹기에 차고 넘치는 점심상은, 내가 상상한대로 군더더기 없이도 아름다운 맛이었다. 균형 잡히고 바스러지지 않은 고유한 맛들의 조합. 자꾸만 감탄하는 나에게 L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여기서 뭐든 다 해 먹어요. 빵도 굽고요."


그제야 테이블 옆 한켠에 놓인 작은 사이즈의 오븐도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L의 집이고, 크든 좁든 요리를 좋아하는 L이라면 어디에서든지 어련히 알아서 다 만들어 낼 방법이 있었다. 이곳에서 이번엔 숫가락을 드는 시점부터 녹음기를 켰다. 우리는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해 ‘재료’ 이야기로도 흘러갔다. 두부 튀김을 하고 싶다면 두부의 물기를 제거한 후에 얼렸다가 해동해서 튀기는 게 좋다는 정보도 얻고, L이 담가서 보관해온 두릅 장아찌를 맛보면서 새로운 식재료를 체험했다. 김치도 직접 담가 먹는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주로 지역 소농들을 통해 재료를 공급받는다는 그녀는 소유한 각종 양념들을 보여주었는데, 나로서는 처음 학습하는 이파리들도 있었다. 빼곡하게, 6평짜리 원룸에 모든 것이 다 있어 보이는 L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밀도 높은 곳은 공간 3분의 1 정도를 차지하는 부엌, 다른 1인 가구 또래들에 비해 그 외 짐은 오히려 적은 편인 듯했다. 나는 독립하지 못한 내 방을 떠올렸고, 쓸데없는 짐으로 들어한 그 방이 그날따라 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튀김과 다른 반찬들을 연신 집어 먹었다. (내가 좀 더 마셨지만)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새 식사가 끝나갔고, L은 이제 디저트까지 내왔다. 블루베리를 얹은 토마토 셔벗. 일전에 P의 가게에서 복숭아 셔벗을 맛봤는데, 올여름 수제 셔벗을 또 먹게 될 줄은 몰랐다. 수제 셔벗은 자기만의 자리를 운영하는 자들의 능력을 보여주는 음식인 걸까. 자기만의 방, 요리, 여름엔 수제 셔버트, 이 사이에 분명 연관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누어 줄 기쁨을 갖고 있으면서도 영원히 공간을 점유하지는 않는 물질이었다.


셔버트를 먹으면서 L이 말했다.


"지금은 내 삶이 조금 마음에 들어요."


강도 높은 스트레스로 '폭발적인' 시간을 막 통과한 후 L의 일상에 초대받은 나는 때를 잘 타고난 사람같았다. L은 쉬는 기간 살이 많이 올라서 좀 빼고 싶다고도 말했지만, 그때 L의 모습이 나에겐 '그녀의 오리지널'로 기억될 것이었다. 그리고 L은 수많은 자기를 통과해온 그간의 시간처럼 앞으로도 계속 오리지널밖으로 나아갈 자신과 마주할 것이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어느덧 집을 구하는 이야기로 흘러갔고, 나는 L이 '집 구하는 기준’을 표로 정리해둔 파일을 보면서 그녀를 더 알아갔다. ‘탈출하는 독립’으로 시작해 일주일 만에 찾아 피난했던 그녀의 첫 집은 그야말로 탈출한 곳, 이후의 L의 집에는 더 많은 단어와 맛이 들어가는 곳이 되어 가고 있었다. 누구나 그렇듯. L만의 방도 탈출, 생존, 그 이상의 필요들, 혹은 가지고 싶은 분위기들과 부분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공간의 가치들로 점점 채워지고 있었다. 지금 L의 방은 난생처음, 대범하게도 겨우 얼굴 두 번째 본 사람을 초대해 점심 식사를 나누며 몇 시간째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소였다. 덕분에 나도 내 처음 작업의 첫 '장면'을 채웠다.


L의 세상도 내 세상도 전보다 넓어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