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지은 Nov 05. 2020

수카라에서 L을 처음 만났다

포장 델리 카페로 운영 중인 '수카라'는 원래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 동네 유명한 비건 식당이었다.(수카라는 2021년 2월 7일 영업을 마지막으로 폐점했다.) 홍대 근처 산울림소극장 1층 공간에서 제철 비건 식재료로 만들어진 균형 잡힌 식사에 디저트와 음료까지 즐길 수 있었던. 코로나가 덮쳐 오기 전에도 수카라에선 언젠가부터 년에 한두 번씩 벼룩시장이 열리곤 했는데, 간단한 식음료를 사 먹으며 그 외 생활잡화를 소규모로 가져와서 파는 사람들, 물건, 구경 온 이들을 구경할 수 있어 기다려지던 이벤트였다. 저널 <삼> 1호 작업을 반 정도 진행했을 무렵인 2018년 6월 중순에도, 마침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 날에 작년처럼 수카라 벼룩시장이 열렸다. 거기서 S와 만나기로 했다.


S는 빌려주는 책방을 운영하는 사람, 다양한 출판물에 관심이 많은 그녀는 <삼> 1호 원고 한 편을 맡은 사람이었다. 원고 이야기도 하고 작년에 구경 못한 벼룩시장 구경도 할 겸 S를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약속 전날 수카라 SNS 계정으로 벼룩시장 메뉴를 살펴 작년에 놓친 제철 과일 빙수를 판매하는 사실을 확인한 덕분에 메뉴 고르는 시간은 따로 쓰지 않을 수 있었다.


수카라에 가까워질수록 S의 모습이 뚜렷해졌다. 나보다 먼저 도착해 이미 시장을 둘러보고 가게 앞마당에 자리를 잡은 그녀도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S 옆에 짐을 두고 가게로 들어가 앵두오디딸기빙수를 주문했다. 음료가 준비되는 동안 내부를 재빨리 훑었다. S와 나란히 앉아 빙수 맛을 보던 그날 눈 앞의 가로수는 마침 딱 6월 중순의 녹음을 발하고 있었다. 너무 짙푸르지도 너무 여리지도 않은 그 사이의 초록색. 피부에 닿는 공기조차 너무 덥지도 습하지도 않았다. 모든 것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아서 일을 시작하기 여전히 좋은 날씨임을 알았다. 가게 마당에 앉은 채 보내는 늦은 오후, 미세하게 부는 바람이 약간의 열기를 주기적으로 식혔다. 오래 대화하기 좋은 장소. 불긋한 빙수를 몇 번 더 맛보는 사이에 S도 곧 내 빙수에 숟가락을 넣었다. 같은 맛을 공유한 우리는 적당히 달고 신맛이 어우러진 맛의 소재로 짧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제 작은 얼음 조각들을 오물오물거렸고, 그러다 그 얼음 조각들을 으드득으드득 씹기 시작하는데 S가 말했다.


"좀 있으면 L이 올 거야. L도 책방 회원인데 여기서 만나기로 했어."


나와 S는 다른 일을 하지만,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일에 속한 부류였다. L과 만남은 언제나 그 사이에 또 다른 새로운 이들이 들락날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S를 처음 안 것도 나와 그녀 사이에 있는 E 덕분이니까.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고 새로운 관계가 탄생하는 익숙하고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거기서 재미가 탄생될 때도 많았다. 늘 그렇듯 L에 관해 물었다.


"L은 어떤 사람인데?"

"L은 지금은 직장을 쉬고 있고…, 아! 그러고 보니 L도 독립해서 살고 있어. 삼 1호 주제가 독립이잖아."


마침 사람을 더 찾고 있었다. 새로 생길 잡지에 자기 이야기를 풀어줄 이를 대부분을 섭외했지만, 권두 인터뷰이는 여전히 고민이었다. 표지를 열고, 속싸개를 펼치면 가장 먼저 접할 장면. 이 면을 당연히 독립이라는 주제로 짜볼까, 아니면 딱히 주제를 좁히지 말고 누구라도 하고 싶은 말 많은 이를 찾는 콘셉트로 기획해볼까. 뭐든 처음의 작업은 사사건건 선택하기 나름이었다. 완전히 자율적으로 일을 만든다는 건 언제나 스스로 한계를 만나기 전까지 무엇이든 해볼 순 있는 것, 자유롭고 실패를 거듭하는 일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어쨌든 시간은 꽤 흘러 가고 있었다. 


"L은 독립해서 산 지 얼마나 됐대?"

"아마 꽤 됐을 걸?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래?"

"L이랑 한 번 이야기해봐."


S의 말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쪽으로 가까워지는 L의 모습이 보였다. 나를 알아볼 때처럼 S는 L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이내 L도 가게 안으로 들어가 역시나 앵두오디딸기빙수를 들고 나타났다. 1년에 한 번뿐인 앵두오디딸기빙수를 노린 사람이 많은 게 분명했다. S는 우리 맞은편 벽돌 난간에 앉은 L에게 나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잡지를 만들고 있는 사람인데 1호로 독립 이야기를 다룬다고. 그리고 L을 소개해주었다. 책방 회원 사실이 유일한 접점인 우린 그 길로 자연스레 '독립'에 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저는 가정폭력으로 독립했어요."


L이 자기 독립을 두고 처음 꺼낸 말. 마치 (더 듣고 싶으면) 각오하라는 소리, 혹은 (이래도) 계속 듣겠냐는 의미 같았으나, 사실 L에겐 두괄식으로 자기의 독립 생활 이야기를 시작하는 하나의 '버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말이다. 더 듣고 싶으니까 나도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점점 더 이야기의 줄기를 당기고 싶어졌다. 그녀의 독립을 이루는 기반은 벗어나고 싶었던 폭력의 일상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독립, 우리가 공유하고 싶은 독립의 이미지라는 생각이 나는 자꾸만 들었다. 폭력적인 일상은 자칫 '특별한 생활'로 여겨질 수 있지만 그 생활 속에 있는 누구도 얼굴에 '가정폭력 피해자'라고 쓰고 다니진 않으니까. 그래서 사실 내 옆에 그가 있어도 마치 없는 것처럼 존재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말이다 L이 그런 것처럼. 그러나 한 해도 가정폭력이 발생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그런 '특별한 해'는 단언코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날고 있다. 검거 인원으로만 따져도 2017-2018년 4만 명대였던 가정폭력 관련 검거 인원이 2019년에 5만 9472명으로 폭증했다는 사실이 경찰청을 통해서 발표됐었다. 코로나 시대로 출발한 올해 상반기에만 2만 5846명이 검거됐으며, 연말엔 역시 5만 명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S가 아니었다면 말 한 번 섞어볼 일 없었을지 모르는 L. 그녀는 내가 길에서 지나친 수많은 또래 중 폭력에서 탈출한 독립생활을 하는 이들 중 한 명일 뿐이다. 아차, 이미 L과 유사한 독립의 배경을 가진 이가 지인 중에 있다는 사실이 이제 떠올랐다. 옆에 두고 사는 것이 폭력인 세상, 내 옆에 피해자 한둘 있는 것쯤 너무 익숙해서 흔한 폭력이 폭력인 줄도 까먹은 세상을 살다가 또 까먹었다.


L은 첫 퇴사 후 처음으로 휴식기를 보낸 지 한 달째였다. '빡센' 직장생활을 꽤 오래 해온 그녀였다. 계속 이야기하면 더 많은 줄기를 발견하게 될 거 같아서 확실히 물었다. 이 이야기를 내가 사용해도 되겠느냐고. 머뭇거리는 기색도 없이 L은 말했다.


"네 괜찮아요."


우린 이미 너무 오래 등받이도 없이 땅바닥에 앉아 있었던 터여서 자리를 옮길 필요가 있었다. 허리가 아프고, 움직이고 싶으니까.


"우리 다른 카페로 자리 옮겨서 더 이야기할래요?"

"네. 그러죠, 뭐."


처음 만난 수카라를 벗어난 우리는 이제 그 주변을 거닐기 시작했다. 근처에서 몇 개의 대로변 카페를 지나 어느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서 두 번째 발견한 카페로 들어갔다. 그녀는 아몬드 라테를, 나는 자몽맥주를 주문했다. 이제부터 나는 녹음기를 켰고, 더 많은 그녀의 독립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했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것은 고구마와 줄기들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독립 고구마 줄기'라고 부르고 싶었다.

고구마에는 줄기가 있다


“집을 나가는 날 아침에 가족들에게 독립한다는 사실을 알렸어요. 그날 아빠한테 또 맞았어요. 일전에 신고했다가 경찰이 그냥 되돌아간 지 일주일이 채 안 된 시점이었죠.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나가 살 집을 알아본 게 일주일 정도였으니까. 경찰에 또 신고하려는데 아빠가 핸드폰을 뺏어 집어던져서 액정이 박살났어요. 그 파편들이 발에 다 박혀서 피가 철철 흘렀어요. 정신없는데 신고하러 거실로 나가려다 머리를 걷어차이고, 집 전화로 112에 신고하고 지구대 경찰이 출동했죠.”

- <삼> 1호, 10쪽


L의 독립 고구마 줄기를 캐는 일은 조심스러웠지만, 나도 그 작업을 하는 게 좋았다. L도 꽤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햇살 좋은 오후에 만나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헤어지며 맞교환한 연락처를 통해 우리는 첫날의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L에게 한 번 더 만나고 싶다면서 그녀에게 집으로 놀러라고 싶다고 말했는데, 이번에도 그녀는 머뭇거리는 기색이 없었다.


"혹시 그래도 된다면 L 씨 집에 언제 놀러가도 될까요? 거기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요. 당연히 거절해도 되고요."

"뭐 그러세요. 지금 백수라서 시간도 있고요."

"그럼 날은 또 연락해서 잡을까요?"

"좋아요."


L의 독립 고구마 줄기 캐기는 그렇게 또 한 번 이어지고 있었다.

이전 11화 ‘느닷’ 없인 만나지 못했을 P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