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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은 Aug 04. 2023

옷가게에서 배우는 헤엄

대학생 때 여행 자금을 모으려 휴학 후 창고형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델리 부서에 배치받은 나는 매일 출근 토큰을 찍고 방한복을 챙겨 입고 장화를 신고 냉장고에서 대량 조리와 패킹 등등을 하곤 했다. 근무한 지 3주 정도 지났을 때였나. 그날도 냉장고에서 땀에 축축해진 채로 오전 작업을 마치고 지수 씨와 식판밥을 비웠다. 잠시 다리를 뻗고 쉬는 중에 그녀가 내 얼굴을 보고 말했다.


“좋겠다 넌. 끝이 있어서.”


지수 앞에 앉은 알바, 처음 볼 때보다 지치고 번들거리는 얼굴이어도 여전히 탱탱한 젊은이는 2주 후면 나타나지 않을 것이었다. 돈을 채워 곧 한 달의 배낭여행을 떠날 참으로, 나는 그날만을 바라보며 춥지만 곧 더워지는 냉장고에서 지수 씨가 늘 하는 일을 힘들어도 힘차게 했던 것이다. (그땐 언니가 아닌 아줌마라 생각했다.) 뜨겁고 거대한 급식실 밥통을 몇 번씩 나르고, 그 밥으로 카레 패키지를 만들고 진열하고, 소불고기 양념과 패킹 등등을 하다 보면 시간도 체력도 훌쩍 써버린 후였다. 난생처음인 일들에 요령도 없이 열심을 떨다 관절염을 얻어 여행 전날까지도 곳곳에 염증 주사를 맞았지만, 치료하면 되니 아픈 게 무서운 나이는 아니었다. 코앞엔 꿈같은 여행이 있었고, 취업이 어려워도 내 길을 있으리란 천성 같은 희망도 있었다. 그런 젊음은 번들거리는 땀자국도 피곤함도 가릴 수 없어서, 자식이 둘인 그 노동자 언니는 내 좋겠음을 단박에 알아봤다. 끝낼 수 없는 노동의 지루함, 그 연료로 영위하는 삶의 슬픔과 기쁨은 당사자여야 비로소 느끼는 것이었다.


그 후로 12년이 지났다. 내 길이 뭔진 여전히 몰라도 평생 밭을 갈며 살아야 하는 게 사람의 일생이라는 진실을 느낀다. 어떤 밭은 그 주인과 무관하게 똥밭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 정도만큼 삶이 흘러가 버렸다. 나는 지금 다국적 패션 기업의 브랜드 옷가게에서 판매사원으로 일한 지 8개월 차다. 인터넷 신문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잡지사와 출판사에서 일했고, 지금까지 세 번의 퇴사를 경험했다. 이전과 달리 내가 제공하는 근로의 핵심은 그 무엇보다 시간이다. 주 20시간(최대 32시간)의 근로를 새 직장에 제공하며, 나머지는 알아서 일한다. 프리랜서? 여기엔 다양한 일과 활동을 담을 수 있지만, 최소한의 돈을 확보하는 게 관건이기에 옷가게 맘대로 주에 32시간까지(만) 연장근로가 발생해도 싫지 않고, 휴일근로는 좀 기대하게 된다.


그 어느 때보다도 퇴사 중에 즉각적으로 다음 일을 구하면서 내 업의 특성이 점점 바뀌고 있다는 모종의 느낌을 받았다. 산을 오르기보단 바다를 헤엄치는 모양으로. 스스로 발 붙인 땅을 붙잡고 목표 지점까지 오르는 일보단 힘을 뺀 채 다가오는 파도에 몸을 맞추는 일. 다른 속도와 파형으로 다가오는 물살을 가르며 자기만의 영법을 익혀 유영하듯 바다를 헤엄쳐야 할 것 같은 일들과 아득한 미래로 가는 거 같았다. 이 느낌을, 나는 경력의 세계가 아닌 직업의 세계로 건너간다고 말하기로 했다.


옷 가게 판매사원은 매장에서 매출이 발생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한다. 쇼핑력 자타 ‘만렙'인 나는 이 옷가게 이용 경험도 많았어서 일의 내용을 대충 짐작했으나, 실제와 격차가 꽤 있었다. 상품이 진열된 매장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이 일에서 보이는 부분에 불과했으며, 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소비와 노동이 서로 이렇게 닿기 어려운 활동이라는 사실을 새삼 알았다. 쇼핑할 땐 좋은 음악, 그것은 정말이지 매장에 오래 머물지 않는 손님만을 위한 것이다. 노동요일줄 알았던 그 노래는 좀처럼 바뀌지를 않았다. 순서까지 같은 노래 릴레이를 6개월 이상 계속 들으며 일하니 음악은 더 이상 음악이 아니게 된다. 의외로 질리는 타이밍은 빨리 왔다 간다. 대신 어떤 노래가 나오면 곧 마감이구나 자동으로 안다. 음악을 시계처럼 감각한다. 영업 종료 시간이 곧인데도 정말 꿋꿋이 매장을 구경하는 손님이 있는 거의 매일, 노래가 끊기면 손님은 당황하고 우리는 안심한다.


어쩌면 음악 견디기보다 더 어려운 게 동료애 쌓기다. 상시근로자 50인 이상인 매장에서 판매직원은 20명이 좀 안 된다. 하루 중 서로 얼굴 보며 이야기 나눌 때는 ‘펑션(매장은 필요한 역할을 약 10개 정도로 나누고 시즌과 시간에 따라 인력을 배치하고 순환시키는데, 그 역할을 펑션이라고 말한다.)'이 순환하는 시점에 바통 터치를 하는 찰나의 순간뿐이다. 우리는 모든 펑션을 익혀 순환 근무를 하고, 기본적으로 휴게나 퇴근 시간이 잘 겹치지 않는다. 요즘은 같은 시간대 일하는 동료들과 중간중간 수다를 나누는 요령을 터득했다. 주당 몇 분씩 발생하는 추가 노동이 무료인 점을 함께 불평하고, 특별한 진상 뒷담화도 한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들 사이에 가장 많이 오가는 말은 “안녕하세요?” “수고했어요~.” “잘 가요~.” 뿐이다. 담백한 것 같아도 뭔가 갑갑하다. 노동자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어 회사에 당장 좋은 일만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매장은 연면적이 3백 평 정도(980.23㎡)이다. 지하 1층(직원 공간) 지상 3층 건물 전체를 쓰는 대형 공간. 이 큰 매장 순환의 핵심 공간은 바로 창고다. 일의 준비와 끝이 모두 이루어지는 곳. 매장엔 옷뿐만 아니라 몸에 닿는 모든 물건이 빼곡하다. 상품이 9천 개 이상이며 당연히 창고에 더 많다. 잘 짜인 각본이 아니라면 손님이 입어보거나 사가는 옷이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원래 그 자리에 다시 놓이기 힘들다. 상품 위치는 수시로 바뀌며, 신상품을 받으려면 악성 재고를 보내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 일을 통해 이 각본의 중요성을 체득하는 것이 이 일에서 가장 반짝이는 부분이라 ‘수영인’으로서 많이 배우는 중이다. 


나의 다른 한쪽 일, 만들어서 팔리지 않으면 소용 없는 책이란 상품의 순환도 실은 의류 상품 순환의 각본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어느 일에나 각본이 중요하다. 옷 가게의 잘 짜인 각본에 따라 탈의실의 옷을 알아서 착착 옷걸이로 배치하는 동안 왠지 팔의 힘이 길러진 느낌이다. 이제 가능한 손목은 쓰지 않고 일할 줄 안다. 육아하는 친구가 한 손으로 애를 들고 한 손으로 다른 걸 할 수 있음을 자랑할 때 난 양손에 옷걸이에 걸린 옷 30벌을 들고 뛰어다닐 수 있다고 농담했다. 첫 근무 날엔 쉬는 시간 화장실에서 소변 보려다 허리가 찌릿해 그 상태로 어정쩡하게 문을 잡고 볼일을 보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일할 때나 안 할 때나 전보다 신경을 쓰고 몸을 더 잘 쓰기 때문이다. 미뤄둔 운동도 시작했다.


우리 매장은 층별로 곳곳에 장식된 식물이 아름답다. 그런데 식물 돌보기 펑션이 가장 난도 높다. 나는 집에서도 40개 넘는 식물을 돌보는 사람인데. 매장 물통은 너무 커서 반 이상 채우면 들고 다닐 수도 없는데, 한 번 받은 물로는 한 층 식물의 반도 다 못 축인다. 물 받는 곳은 1층에만 있다. 맙소사가 절로 나온다. 그래도 이번 주엔 탈의실 앞에서 나보다 이 공간에 오래 머문 대형 선인장이 내 주먹보다 큰 마젠타 색의 꽃을 피우는 걸 보았다. 물을 주고 싶었는데 펑션을 뜰 수가 없었다. 일터에서 보는 어느 때보다 진귀한 광경이라 탈의실에 올 때마다 관찰했는데, 이틀 쉬고 왔더니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원래 이렇게 빨리 지는 꽃인지, 물이 너무 먹고 싶었던 건지 알 수 없다. 나도 매장에선 물을 자주 마시게 되는데, 꽃 피우는 중에도 겉흙이 너무 말라 있던 게 맘에 걸린다.


얼마나 부러웠을까, 지수 씨는. 알바가 끝난 후 잊고 살았는데 대 세일, 옷 중량이 여름의 몇 배에 달하는 작년 겨울 세일 때부터 일을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퍼뜩 떠올랐다. 나와 거의 같이 입사한 A가 족저근막염이 심해져 퇴사한 날이었다. 가끔 휴식 시간에 마주치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라고 했는데, 말도 없이 떠나다니. 직원 공간에 남김 과자와 메모를 보고 그녀가 퇴사한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 일이 없으면 누가 퇴사한 지도 알기 어려운 일터다.) 다소 놀라며 A의 퇴사 소식 묻는 나와 달리 매니저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정들만하면 퇴사하는 학생 선배들은 이후에도 주르륵 있었다. 단순노동이라 불리는 이 일도 그렇게 단순하진 않아서 숙련도와 팀워크가 중요하다. 일하는 사람이 계속 바뀌면 팀워크도 그때마다 업데이트가 된다. 12년 전 학생이었던 나도 코스트코 델리 코너를 그렇게 떠났는데, 이제야 그때를 복기한다. 지수 씨를 비롯한 직원들은 일하면서 얼마나 많은 알바생들을 보냈을까. 옷가게와 달리 한 작업실에서 부대끼며 일하는 공간이어서, 그곳은 “안녕하세요” “수고했어요” “잘 가요” 이상의 말들이 오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 바다 위 직업의 세계는 수영인들이 뭔가를 꽉 붙잡기 힘들게 출렁임이 잦다. 열린 방향의 드넓은 공간에서 저마다 자기 삶으로 헤엄치며 나아간다. 우리 매장엔 새로운 사람이 많이 들어왔고, 나도 그 일에 익숙해졌다.


새로운 일터에서 가장 늦은 퇴근 시간은 밤 10시 반. 오늘도 마감 후 퇴근, 퇴근 후 이 글을 쓴다. 종종 2분, 5분, 7분, 퇴근 토큰을 찍는 게 늦어질 때가 있어도 그 애매한 추가 노동은 없던 일이 된다. 다행히 오늘은 1분도 버리지 않고 칼퇴했다. 매번 시간에 정말 민감해지게 만드는 것이 역시 바다를 헤엄치는 일과 비슷하다. 나는 지금 바다라는 직업의 세계에서 이전과는 다른 생을 터득하고 있다.


 <복음과상황> 공간 & 공감에 연재하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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