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멈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제 목 꺾어낸 저 꽃도
아픔을 느낀단다
고통을 느끼지 못해서도
눈물 흘릴 줄 몰라서도 아닌
말 않는 것이란다
지고 나서야 깨닫는
가장 활짝 피었을 때의
아름다움과 소중함
그리고 후회
사랑이란 그런 거란다
그러니 얘야, 울지 마려무나
저 꽃도 언젠간 진단다
만개했다가 잎이 지고
썩어 문드러진 자리에
새로이 싹이 움트고
모든 꽃은 그런 거란다
- 삼류작가지망생
죽음이란 필수 불가결하다. 언제나 도처에 있으며 직접 맞닿기 전까지는 그것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다(짐작은 가능할 수도 있지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며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의료학의 발전, 공상과학 문학 등의 형태로 발현되어 왔다.
또 죽음과 관해서는 철학과 종교가 빠질 수 없다. 철학과 종교는 이러한 죽음에 대해 ‘받아들이는 자세’와 ‘삶 그 자체의 가치’에 초점을 두며 윤회와 사후세계, 이데아 등을 논한다. 다만 나는 현생의 삶에서 일어나는 행동의 형태가 사후세계의 절대자들에 의해 평가되는 것 대신에 현생의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에 더 초점을 두고 이야기하려 한다.
우리는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의 수정을 통해 지적 생명체로 세상에 태어난다. 부모, 가족, 친구, 친척, 동네 주민, 직장상사, 은사님, 자식의 죽음 혹은 의사의 진단에 의한 본인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을 때에도 직접 죽음과 맞닿아있진 않지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죽음을 간접 체험한다. 삶의 행동과 사고보다 죽음의 것이 더 강렬하듯, 이런 체험은 감정이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어떤 죽음은 후회와 아쉬움으로, 다른 어떤 죽음은 정의감과 안도감으로, 또 어떤 죽음은 삶의 원동력으로.
죽음을 ‘나’에 한정 지어 생각하면 그냥 끝이지만 우리는 완벽한 개인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어떠한 형태로든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며, 이는 타인이 나에게 끼치는 영향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불완전한 삶의 끝을 간접 체험하며 생각하고, 좌절하며, 극복하고, 성장한다. 어떤 죽음은 너무 깊이 파고들어 회복할 수 없는 상흔을 남기고 평생 고통스럽게 남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영위하려 노력하거나 그와 같은 죽음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들을 통해 발전하고 성장한다. '나'는 죽으면 현생의 삶은 끝이겠지만, 역설적이게도 타인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삶이 변화하고 '나'의 죽음 또한 그러하다.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니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해야지'라거나 '인간은 죽음을 피해 갈 수 없으며 나도 언젠간 죽을 것이니 삶은 의미가 없다'라기보다는 내가 타인의 삶과 죽음을 통해 성장해왔듯 나의 삶과 죽음 또한 누군가에게의 성장으로서 바라보려 한다. 그 삶이 초라하든 거창하든 위대하든 거지 같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우리가 살아있는 이 순간에서는 다양한 죽음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민하고 집중한다면 언젠가 우리가 죽음과 맞닥뜨렸을 때, 누군가가 우리의 바통을 이어받아 더 나은 삶과 정신을 추구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