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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류작가지망생 Nov 27. 2020

시-세이 ; A(진정한 나는 없다)

나들

나들




미로 속에 떨어졌어요
수많은 내가 나를 둘러싸고서
날 따라 해요

첫 번째 나는
반짝이는 눈망울 안에
미래의 나를 그려요

두 번째 나는
12월 겨울 절벽에서 떨어져
나뭇가지를 간신히 붙잡고
내년 겨울까지 매달려요

세 번째 나는
편애와 유착 관계로 점철된
교수의 불합리한 점수 앞에
입 닫고 굴복해요

네 번째 나는
매연에 흐릿해진 별빛 따라
별자리 지도를 펼치고는
손가락으로 더듬어요

다섯 번째 나는
저금통이 되어 꿀꿀 꿀꿀
동전을 등에 담고서
제 배를 째어요

여섯 번째 나는
복사기 위에 얼굴을 대고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똑같은 표정을 찍어내요

일곱 번째 나는
인공위성 떠있는 하늘에
별자리 지도를 들어 올려
슬픈 미소의 눈물을 지어요

여덟 번째 나는
별자리 지도를 갈가리 찢어
원두 한 줌과 프림 한 스푼
커피를 한 모금 마셔요

그들은 날 따라 할 뿐이에요
진짜 날 찾아 미로를 헤매요
거짓된 나들을 이리저리 더듬어 도착한 끝에
천막 밖으로 나오니 간판이 보여요

거울의 방

다시 들어가요
그들은 날 따라 할 뿐이에요
거짓된 나들을 때리고 침을 뱉어요
헤매다 아홉 번째 나를 만나요

아홉 번째 나는
다른 나들과 날 가리키며
진짜 난 여기에 없대요
나에게 주먹질을 해요

아홉 번째 나와 나란히 섰어요
그의 손등에 피가 흘러내려요
첫 번째 나도, 두 번째 나도, 세 번째 나도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여덟 번째 나도 손등에 피가 흘러요

폴라로이드를 꺼내
다른 나들을 순서대로 사각형 필름에 담아
그들을 순서대로 엮어선 천막을 나와요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디로든 가야 할 것 같아서 걸어요


- 삼류작가지망생






 나는 장난기가 많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이상적인 가치와 정신을 좋아하며 그늘진 담벼락 사이에 낀 이끼를 좋아한다. 지하철에 스며있는 삶의 향기를 좋아하고, 철제 난간에 차갑게 스미는 죽음의 온기를 좋아하고, 그러한 마음과 고통을 문자로 가공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나를 사랑한다.


 하지만 A는 나의 그런 모든 면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A는 나의 삶에 대해 꽤 비관적이며 회의적인 태도로 내게 말한다. 장난기가 많은 나에게 ‘정도껏 해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말하며, 사람들과 대화할 적에 ‘저 사람이 네 말을 흥미롭게 듣기나 할까?’라며 혀를 찬다. 이상향을 꿈꿀 때는 ‘이상적인 꿈을 꾸는 자는 현실적인 것을 바라서는 안 돼. 그럴 거면 네 이상적인 꿈을 현실적인 내용으로 타협을 하던가’라고 초를 치기도 한다.


 A는 특히 내가 글을 쓰는 것을 싫어한다. ‘넌 재능이 없어. 있었다면 이미 성공했겠지’부터 ‘그 정도 노력과 끈기로는 뭘 할 수 있을 거 같아?’, ‘사실 넌 지금까지 매달려온 게 글 쓰는 거니까 아직 붙들고서 버틸 뿐이잖아’라는 말도 서슴없이 내뱉는다. 그러면서 A는 글쟁이의 그 끝엔 싸늘한 죽음만이 가득하다고 늘 덧붙였다. 대출금 상환이라는 일생일대의 목표로 살아가는 껍데기처럼.


 나는 알고 있다. A는 내가 싫어서 험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나를 사랑한다.


 이상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나와는 달리 A는 매우 현실적이다. 맨 처음 A를 만났을 때는 화가 났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지, 보란 듯이 성공하기 위해 더 열심히 살았다. 다음 다시 A를 만났을 땐 그의 말에 수긍했다. 나는 한 없이 작아졌고 나의 꿈을 잠시 내려두었다. A의 조언에 따라 회사에 들어가 돈을 벌었다. 나는 스트레스와 잦은 야근으로 피폐해져 갔지만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A가 나에게 더 이상 험담도, 조언도 하지 않는 상황이 너무 편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큰 변화를 겪은 내게 다시 찾아온 A는 여전했다. ‘때려치우고 뭘 할 건데? 또 의미 없는 것들에 얽매이며 살려고?’ A는 내게 핀잔을 쏟아냈다. 처음 만났을 땐 그에게서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했고, 두 번째엔 회사에서 만난 선배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땐 나의 모습을 찾아냈다. 그는 내가 되었고, 나도 그가 되었다.


 프로이트의 트라우마에 입각한 원인론으로 첨예하게 덧칠돼 있던 나는 A에게 말했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은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다’고.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더 깊게 파는 것이 아니라 구덩이에서 빠르게 빠져나오는 것이다. 나는 A가 나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의 말에 의문을 품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A는 생각보다 꽉 막힌 성격은 아니었다. 나는 A와 약속했다. 나는 나다. 어두운 면도, 밝은 면도, 우울한 면도, 절망적인 면도, 모두 나다. 그리고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기로.


 현재의 나라는 점 하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똑 떼어져서는 과거의 나에 붙어 과거의 선이 된다. 하지만 미래의 선에서 점 하나 똑 떼어져 현재의 나라는 점이 되지는 않는다. 지금도 끊임없이 나는 계속 점을 찍어나가고 있고 과거의 선을 이어나갈 뿐이다.


 나는 그런 A를 사랑하게 되었고 나는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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