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산타가 싫어요
어른이 되니까 알 수 있어요
누가 착한지 나쁜지 알고 계시는
산타는 있어요
눈물 참는 아이에게만
대견하고 어른스럽다
선물을 나눠줘요
우는 소리를 내면
빨간 경광등 켠 썰매를 타고서
산타가 잡으러 와요
산타나라에서는 나쁜 거래요
여기는 내 땅인데
사실 여긴 산타나라래요
난쟁이가 되어 초록색 작업복 입고
착한 아이들을 위한 선물을 날라요
잘 참으면 너도 선물을 준대요
루돌프처럼 썰매를 열심히 끌어야만
사슴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대요
산타는 있어요
어디에나 있어요
- 삼류작가지망생
감정. 오묘한 녀석이다. 어쩔 땐 이런저런 감정들에 이끌려 평소엔 하지도 않을 법한 행동을 하다가도, 어쩔 땐 갑자기 희미해져서는 당최 무슨 감정이라고 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다. 흔히들 정서 불안이라고 말하는 돌발적인 것들. 그럴 때면 의문이 들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감정은 분명 상황의 해석을 통해 일어나는 마음일 터인데 왜 그런 걸까.
‘찐빵’이라고 하더라도 누구는 호빵, 누구는 동그란 팥빵, 혹은 다른 이름으로도 부른다. 또는 찐빵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전혀 생뚱맞은 빵을 가지고 ‘찐빵’이라 부르기도 한다. 누군가에겐 ‘사랑’인 것이 다른 이에게는 ‘질투’와 ‘분노’ 일 수 있다. 누군가에겐 ‘슬픔’인 것이 다른 이에게는 ‘의연함’이나 ‘기쁨’ 일 수도 있다. 도식화해보자면 나, 혹은 타인의 감정 판단의 주체를 A, 판단의 대상을 B, 감정의 단어를 C로 두면 '감정이란 A가 정의를 내린 ‘B가 C를 느낄 때 하는 행동이나 신체변화’의 해석’이 된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김 씨에게 공짜표를 줬더니 김 씨가 박수를 치며 웃는다 -> 나(A)가 정의 내린 ‘김 씨(B)가 행복(C)을 느낄 때 하는 행동’에 ‘박수를 치며 웃는다’가 있으므로 ‘김 씨는 행복하다’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대상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그리고 그 대상의 행동이 자신의 기준과 얼마나 일치하는가에서 따라 달라진다. 김 씨는 행복을 느낄 때 ‘쑥스러워 굳은 표정으로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는 행동이 있고 내가 그 사실을 모른다면 김 씨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나, 혹은 타인의 감정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단순 정보만으로 연결지어 속단할 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해와 불신이 생기는 과정이다.
이는 감정의 이해가 절대적인 형태가 아닌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그물처럼 얽혀 구축된 개념의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정서 개념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이러한 작용은 개인의 몸과 마음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별다른 감정이 없던 두 사람이 징검다리를 건널 때, 공포심 때문에 상승한 심박수가 마치 연애감정이라고 착각하는 징검다리 효과처럼 신체적 반응은 정서 개념의 판단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에서 피어오르는 감정들이 매우 흐릿하고 형체가 명확하지 않아 답답해하기도 한다. 누구나 한 번씩은 ‘왜 화냈는지 모를 때’, ‘왜 우울한지 모를 때’, ‘왜 설레는지 모를 때’ 등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논리적 근거가 부족하지만 현재의 심리적 상태를 인지하는 경험.
누군가는 반문할 수도 있다. 감정을 느꼈기 때문에 신체의 변화나 행동이 나오는 것 아니냐고. 통념적으로 '감정으로 인해 신체적 변화가 일어난다'라고 생각했지만 인지과학의 전통적인 정서 이론에서는 감정이란 신체적 변화와 동시에, 혹은 이후에 찾아온다. 몸과 마음을 분리하여 바라봤던 대표적인 이론으로는 제임스-랑게 이론, 캐드-바드 이론, 이요인 이론 등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원론적 이론들의 한계를 비판하며 '체화된 인지'라는 일원론적 관점의 이론이 등장하는데, 결국 핵심은 '마음이란 신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에 의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신체적 환경적 경험의 반복이 인지 능력의 기조가 되고 그로 인해 형성된 정서 개념이 신체적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고 말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는 정서 불안이 감정 표현의 억제를 반복적으로 체화하는 과정에서 온다고 본다. 여기서 말하는 ‘표현’이라는 것은 말이나 글 따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인지 상태를 뜻한다. 언어로 정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원인 모를 감정들은 수백 수천 개의 수식을 암산하는 것과 같다. 답안지가 공백으로 남아서는, 공식과 수많은 연산들만 계속 머릿속에 맴돌 뿐이다. 조금 더 건강한 심적 안정을 위해서는 이러한 감정들을 배출하고 정리하여 생각을 정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감정 중에서도 특히나 중요하게 강조되는 감정이 있는데, 바로 ‘슬픔’이다. 불안하고 부정적인 정서를 해소하고 인간이라는 사회적 존재로서 나와 타인을 연결하는 주요 감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현대인들이 이를 해소하지 못하고 정서 불안을 가지고서 살아간다. '슬픔을 참아내는 것이 어른스러운 것이다'라는 사회적 풍토 속에서 말이다.
내 유년기의 어느 크리스마스였다. 무슨 일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울음을 터뜨렸고 부모님은 계속 울면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지 않을 거라며 다그쳤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울면 나쁜 아이야?'
아이에게는 의젓함을 가르치고, 엄마 아빠는 육아가 좀 더 편해지는 일석이조의 조기교육 중 일환이었겠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우는 어른도 나쁜 아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눈물이라는 대상에 뿌리 깊게 박힌 성차별적인 사회적 인식도 한몫한다. 남자에게는 계집애처럼 또 질질 짠다고, 여자에게는 계집애라서 또 질질 짠다고.
산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다. 누가 착한 아이인지 나쁜 아이인지. 산타할아버지는 있다. 그것도 우리 주변에 아주 많이, 한둘이 아니다. 슬픔 억제의 능숙함으로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고 잘 참는 사람에게는 선물을 준다. 그들은 자신의 윗대로부터 슬픔을 억제하는 법을 교육받았고, 그들의 윗대의 윗대 또한 그래 왔다. 슬픔을 표현하지 않는 것은 성인으로서 갖춰야 할 인내와 끈기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는 솔직한 표현이 나약함으로 변질된 ‘슬픔을 억제하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자신의 슬픈 감정을 숨길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사회적 역할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기형적인 형태의 근성으로 자신의 감정을 왜곡한다. 그리고는 오해가 시작된다. 결국 슬픔을 이겨내지 못한 내가 문제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외국인이 흔히 말하는 한국 고유의 ‘한의 정서’란 무엇일까. 결국은 슬픔을 참다 참다못해 폭발하는 농밀한 분노가 아닐까. 극심한 슬픔의 억제는 분노가 되고 타인과 나를 가학 하는 촉진제가 된다. 우리는 감정을 배출함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머릿속에 잔재하는 감정들은 날 것 그대로의 재료에 불과하다. 상하기 전에 이를 꺼내서 적절하게 요리하고 소화시켜 영양분으로 만들어야 한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소주 한 잔의 안줏거리로 뜯어먹을 수도 있겠지만 더 좋은 것은 글로 적으며 정리해나가는 것이다.
글이라고 해서 거창할 필요는 없다. 한 번도 써본 적 없다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쓰는 것이다. 구성을 짤 필요도 없다. 글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소통하기 위해 글이라는 도구를 사용할 뿐이다. 초고는 구어체에 거칠며 투박한 어휘들로 가득하며, 그 단어를 유심히 살펴보면 어떤 것은 내가 느끼는 것에 비해 과한 표현도 있고 생각 외로 소극적인 표현도 있을 것이다. 그런 무의식적인 부분들에 대해 스스로 그렇게 표현한 의도를 생각하며 다시 언어로 정리하다 보면, 형체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던 미지의 슬픔과 두려움이 좀 더 명확한 형체로 다가온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법을 반복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들이 말하는 ‘강인한 것’이란 결국 밀려오는 슬픔의 파도를 외면한 채 ‘눈 감는 것’이라고. 밀물이 있으면 썰물도 있다며 그저 견디라고 하지만 우리는 두 눈 부릅뜨고서 파도를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파도를 피해 뒷걸음을 치든, 몸부림을 치며 수영을 하든 간에 뭐라도 할 수 있을 테니. 헐레벌떡 도망치거나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고 한심하다며 손가락질하는 그들처럼 감정의 수면이 정수리까지 차오른 줄도 모르고 눈 감은 채로 익사해서는 안 된다. 그 속에서 의연하게 유영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수영실력을 갖추기는 어렵겠지만 파도를 똑바로 보고 팔다리를 휘적이며 체화를 시켜야 한다. 슬픔이라는 감정의 건강한 정서 개념 형성을 위하여.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슬픔을 잘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더 행복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모든 카타르시스는 슬픔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