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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류작가지망생 Nov 29. 2020

시-세이 ; 아버지의, 나의 꿈

새장

새장




1
수평선 너머 이름 모를 섬을 찾아서
새장을 떠날 적에 사람들이 말했다

그렇게 떠난 이들이 수없이 많단다
섬 찾은 이 없어 망망대해 떠돈단다
돈 없어 익사한 시체가 그득하단다
내 옆에 이 새도 그렇게 떠났다가
후회하고 부리를 돌려 돌아왔단다

날 쪼는 여럿 부리들 손가락질하며
나는 그래도 섬을 찾아 날아갈 거요
밥 잘 주는 새장이나 찾으시오
이름 모를 섬 찾아 높이 날아가네


2
이름 모를 섬 찾아 떠난 그 새는
출생이 새장 속 두 월급쟁이었다

아이새 15년 해 넘겨 지낼 적에
아비새가 이름 모를 섬 찾아 떠나
제때 돌아오지 못해 정처를 잃고
다섯 해 굽어 떠돌아다니며 지냈다

아이새는 날갯짓마저 미숙해서는
제 스스로 나는 법을 몰랐었지만
다섯 해 굽을 적에 날개가 자라서는
아비새의 울음소리에 깃털 퍼덕이며
새장에서 나와 아비새와 재회했다

아이새는 지난 15년의 모습보다
더 짙어진 5년 후 아비새의 환부에
울지 않고 날개를 펼쳐 자랑했다

철창 밖의 삶을 지내온 지 십몇 년
싸늘한 주검으로 일주일 만에 발견된
아비새의 사인은 지독한 집안 내력이었다


3
호상이 아니어라 호상이 아니어라
시끄럽게 재잘대는 부리들 속에서
아이새는 무덤 곁에 삼일을 지냈다

네 날갯짓이 자랑스럽단다 말했다
얼마나 높건 날개질이 크던간에
날개질을 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그러나 다시 새장 속 아이새가
멋지게 날기를 바라지만서도
제 처지가 그 날갯짓이었던 탓에

바라지만서도 바랄 수가 없어
네 날갯짓이 자랑스럽단다 말했다

아비새의 삶 끝에 남은 것만 보며
사람들 부리를 이리저리 놀릴 적에
아이새는 그들을 연민했다

섬을 찾은 자의 날갯짓에도
섬을 찾지 못한 자의 날갯짓에도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서
점점 얇아지는 그들의 날갯죽지에
아이새는 날개를 펼쳐 올렸다


4
수평선 너머 이름 모를 섬을 찾아
새장을 떠나 날개 펼치고 날아가네

바다 위 표류하는 시체들 가운데
나를 발견하네 아비새를 발견하네
그들의 날개가 꺾이기 전 펼쳐낸
가장 빛난 순간의 깃털 있는 그곳에
내가 향할 이름 모를 섬이 있네

수평선 너머 이름 모를 섬을 찾아
오늘도 두 날개 펼쳐 날아가네


- 삼류작가지망생






 2018년 6월 23일 토요일 오전 9시.
 아침부터 요란하게 울려대는 핸드폰 진동소리. 전날 밤, 새 회사의 적응과 업무 스트레스를 입사 동기들과의 술자리로 풀었던 탓에 눈은 쉽사리 떠지지 않았다. 한참을 미적거렸고 전화는 이내 끊겼다.
 모르는 번호였다. 보이스피싱이겠거니 하며 알림을 확인하는데 부재중 통화가 다섯 통이나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걸어보려는 차에 메시지가 왔다. 나는 의자에 걸려있던 옷을 대충 걸쳐 입고는 집을 뛰쳐나왔다.
 
 우리 친가는 집안 내력으로 당뇨병을 앓아왔다. 국민학교 운영회비 한 번을 내지 못해 결국 학업을 포기했던 할아버지는 삼 남매의 학교부터 결혼, 집과 빚까지 모두 책임졌었던 그야말로 자수성가의 표본이었다. 다섯 살, 명절날 친가에 내려갔을 때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술 담배는 입에 대지도 않고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탄력 있는 근육에서 젊은 날의 노고와 자기 관리가 느껴지는 신사셨다.
 그런 친할아버지는 채 오 년도 되지 않아 화장실에서 한 번 쓰러지신 이후로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시게 되었다. 햇수가 넘어갈수록 산책의 빈도는 줄어들었고 걸음걸이는 점점 느려졌다. 야위어가던 팔다리는 결국 뼈대만 남아 앙상해졌다. 미음조차 삼키기 어려운 와중에도 아프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앓는 소리 한 번 낼 줄 모르는 분이었다. 테니스를 치다가 인대가 늘어났을 때에도, 사업이 망해서 십여 년을 지내온 아파트가 경매로 넘어갔을 때에도, 어머니와 별거를 하고 내가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 들어갔을 때도.
 외가도, 친가도, 모두가 아버지를 욕했다. 나 역시 아버지를 원망하며 지내온 지 사 년, 아버지에게서 문자가 왔다.
 ‘잘 지내냐’
 아버지의 문자에 ‘오랜만이네’라고 답장을 보내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다. 몇 번이나 물어오는 저녁 약속에 나는 그저 바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택시가 건널목 앞에 멈췄다. 택시에서 내리고는 지도를 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저 멀리 골목에서 경찰 한 명이 나에게 손짓했다. 가쁜 숨으로 골목을 꺾어 들어가자 검은 비닐에 둘둘 싸매진 무언가가 들것에 실려 긴급이송 차량에 들어가고 있었다.
 ‘반장님, 이제 식사하러 가시죠’
 처리반 직원 하나가 들것을 트렁크 쪽에 밀어 넣으며 말했고 나는 떨려오는 아랫입술 밑에서 치닫는 헛구역질을 간신히 삼켜냈다.
 ‘혹시 규식이니?’
 아버지 연배의 두 사람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분명 어렸을 때 본 기억이 있는 얼굴들이었다. 기억을 더듬던 차에 먼저 통성명을 건네셨다. 시신을 발견해주신 아버지의 초등학교 동창분들이었다.
 한 분의 차에 올라타 관할 경찰서로 향했다. 혹여나 흐느낌이 흘러나올까 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고 찢긴 입술 옆으로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운동을 좋아했다. 친가 쪽 사람들이 다 운동신경이 좋았다. 큰고모와 작은 고모는 테니스로, 아버지는 배드민턴으로 지역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나의 유년기 시절에는 술과 담배를 하셨어도 사십 대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군살 하나 없으셨다. 담배 냄새가 너무 싫다는 열 살 아들의 말로 담배도 단숨에 끊으셨다. 짙은 눈썹에 오뚝한 코, 날렵한 턱선과 다부진 몸은 물론 곧은 정신력을 지녔던 아버지는 언제나 나의 우상이었고 롤모델이었다.
 2012년 12월. 성신여대입구역에서 오 년 만에 다시 만난 아버지의 예전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탄력 없이 처진 얼굴살에 앙상한 팔뚝, 이와는 대비되는 툭 튀어나온 배, 느려진 걸음걸이. 그리고 헛숨이 절반 정도 섞인 힘없는 목소리.
 우리는 별다른 말없이 메뉴를 상의하고 초밥집에 들어갔다. 주문을 마치고는 다시 어색해졌다. 오랜 침묵 끝에 아버지가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두통과 비염, 안구건조증 외 기타 자잘한 만성질환, 특히나 갑자기 닥친 경제적, 심적 스트레스로 인해 쇠약해진 어머니의 상태를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냥 뭐 똑같지. 아빠는?’
 ‘예전엔 좀 안 좋았는데 지금 많이 좋아졌어. 너는?’
 이후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대신 IMF 이후 아버지가 전 회사에서 믿을 만한 부하들을 데려와 회사를 차렸다가 그 부하들에게 사기를 당하고, 공금횡령을 당하고, 기우는 가세에도 자존심 때문에 말하지 못했다가 빚이 불어난 탓에 집이 넘어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청하를 한 병씩 비워냈고 아버지는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게 왜 아빠 잘못이냐고, 전혀 미안할 일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역으로 향하는 길에 아버지는 조용히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15년 만에 손을 잡고서 길을 걸었다.
 2013년 1월. 입대 당일에 아버지와 점심을 먹고선 102 보충대에 들어갔다. 휴가 때에도, 제대를 하고 나서도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와의 술자리에서 사장에게 욕지거리를 듣고 퇴사한 이전 회사, 카톡 한 번으로 헤어진 삼 년 동안 교제했던 전 여자 친구, 설렘 가득한 첫 직장, 많은 것들을 쉽게 나눴다. 아버지의 원룸에 찾아가 밤새 이야기를 하다가 잠들기도 했었다. 우리는 지난 16년의 세월보다 훨씬 더 빠르게 가까워져 갔다.
 아버지는 내가 직장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아쉬워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자신 때문에 내가 소설가의 꿈을 포기한 건 아닌지.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족들이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어느 모바일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판타지 소설을 연재하고 있었다. 등하굣길에도, 수업시간에도, 집에 돌아와서도 글을 썼다. 아마 하루에 족히 7시간에서 10시간은 슬라이드 피쳐폰 자판을 두드렸을 것이다.
 하루는 아침 조회 때 핸드폰을 내지 않고 수업시간에 글을 쓰다가 가정 선생에게 폰을 뺏겼던 적이 있었다. 몰래 사용하다 걸리면 한 달 동안 압수당해야 했고 나는 상황을 설명하며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 부디 돌려달라 부탁했다. 가정 선생은 생각해보겠다며 일단 집에 돌아가라고 했다.
 다음날, 어머니 사무실로 찾아온 가정 선생은 핸드폰을 뺏기게 된 경위를 설명하며 이번만 예외적으로 돌려주지만 앞으로는 수업시간에 하지 못하게 지도해달라 말했다. 그제야 부모님은 내 꿈이 소설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그 모바일 커뮤니티에 쪽지가 하나 날아왔다. 처음 보는 아이디였는데,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커뮤니티 소설 작가가 아버지 친구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연락했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러지 말라며 짜증 냈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그 커뮤니티 사이트가 사라진 후에도 아버지는 친구들을 만나면 매번 아들이 소설가라며 자랑했다고 한다.
 아쉬운 표정을 짓던 아버지에게 말했다. 일하면서 그래도 글은 꾸준히 쓰고 있다고, 포기한 게 아니라 계속 준비하고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관할 경찰서에서 조서를 작성하고 나왔다. 사건의 경위는 이러했다. 일주일 전부터 연락이 되지 않아 이상하다고 느낀 친구분들이 주말에 서울로 올라와 아버지의 원룸을 찾아갔다. 문 앞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낌새를 눈치챈 친구분들이 경찰을 동행해 강제로 문을 열었고, 그렇게 아버지는 발견되었다.
 대리 인계된 장례식장에서 안치실 입실 절차를 마치고는 아버지 친구분들 세 분과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친구분들은 간단한 반주를 걸치면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네 아빠가 너 만나는 날이면 우리랑 전날에 새벽까지 술을 퍼부었어도 아침에 일어나서는 아들 만나러 가야 한다면서 그렇게 꽃단장을 했어, 인마’
 한 친구분 말씀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만나면 맨날 네 이야기만 했다. 지금도 너는 태현이한테 자랑스러운 아들이야. 그 마음을 잊으면 안 돼’라며 덧붙이셨다. 나는 밥이 더는 들어가지 않아서 숟가락을 내려두었다.
 곧이어 친할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소식을 들은 큰 고모부와 작은 고모부가 이쪽으로 오고 계시다는 말씀을 하셨다. 친할머니의 말이 뚝뚝 끊어졌다.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무언가를 삼켜내려는 듯 간신히 짜낸 목소리로, 좋게 떠난 것도 아닌데 할머니는 장례식 없이 보내고 싶다 말하셨다. 난생처음으로 친할머니에게 화를 냈다. 아무리 추모해줄 사람이 없고 좋지 않게 가셨다 해도, 난 빚을 져서라도 장례를 치를 거라고. 친할머니도 알겠다고 하셨다.
 ‘진짜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떠나서 불쌍해서 어떡하니......’
 친할머니는 자신이 아버지 생모가 아닌 건 알고 있나고 조심스레 물으셨다. 대학교 입학 기념으로 사촌누나가 사줬던 VIPS에서 이미 들은 적이 있었고, 나는 알고 있다고 답했다. 자신이 배 아파하며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자식같이 키웠는데 너무 속상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으셨다.
 큰 고모부와 작은 고모부가 도착하고 나서는 장례식 관련 서류들에 서명을 하고 일부 잔금을 치렀다. 주차장에서 줄담배를 태우며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문자로 알렸다. 원칙대로라면 당일날 치르는 것이 맞지만 너무 늦은 시간에 결정됐기도 했고 한 사람이라도 더 빈소에 찾아왔으면 하는 바람에 그냥 다음날부터 치르기로 했다. 아버지의 영정사진으로는 전에 이전에 한 초밥집에서 내 핸드폰으로 찍어드린 사진을 잘라 쓰기로 했다. 큰 고모부와 작은 고모부는 내일 일찍 오기로 하고는 집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 친구들도 남아서 삼일 모두 도와주시겠다며 근처 모텔로 향하셨다. 장례식장에 혼자 남았다.
 유독 짧았던 하루였다. 낮은 주차 안전바에 앉아 담배를 태웠다. 그제야 나는 목놓아 울었다. 미안함, 서운함, 안타까움, 연민, 후회. 담배 두 갑을 비우고 나서야 빈소에 돌아왔고, 아직 아무것도 꾸며지지 않은 텅 빈 단상 앞에서 잠들었다.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는데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급하게 천호로 택시를 타고 넘어갔다. 아버지가 가로등 아래에서 만취한 채로 쓰러져 있었고 어머니는 그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하셨다. 아버지를 불러보지만 알아보지도 못하고 거동도 어려운 상태였다. 나는 경찰을 불렀다. 경찰 분과 함께 아버지를 부축하고 인근 모텔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버지의 연락에 같이 저녁자리를 했고 과거 자신의 잘못에 대한 한탄과 미안함을 표현하며 계속 술을 마셨다고 했다. 그리고는 식당을 나와 걷다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며 내게 아버지의 건강상태에 대해 아는 것이 없냐고 물었다. 나는 예전보다 많이 살도 붙고 나아졌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다음날도 출근해야 했기에 먼저 돌아가야 했고 나는 모텔에 남기로 했다. 아버지를 잘 보살펴달라는 말을 남기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버지는 대부분 기억하지 못했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 표정으로 나와 함께 해장국을 먹고는 집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하기 전 명절날, 그러니까 2018년 1월. 그날도 어김없이 모든 친가 사람들이 모여 저녁식사를 했다. 이전보다 살도 좀 더 붙고 밝아진 아버지의 모습에 나도, 친척들도 안도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정류장에서 아버지는 조금 떨어진 거리로 이동해 아랫배에 주사기를 꽂았다. 곧이어 정류장 쓰레기통에 구토를 했고 연신 괜찮다고 말했다. 나는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아버지의 손부터 옷까지 온통 흩어진 구토 찌꺼기를 닦아냈다. 같은 버스를 탔고, 다음을 기약하며 아버지가 먼저 내렸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을 켰다. ‘당뇨병 주사’를 검색했고 아까 그 주사기와 똑같이 생긴 사진을 클릭했다. 인슐린 주사였다.
 당시 아버지는 내 명의로 된 핸드폰과 카드, 통장을 사용하고 계셨는데 문자 알림 서비스를 해지하지 않은 탓에 아버지의 카드 사용 이력이 계속 나에게 날아왔었다. 사용처의 대부분은 마트와 약국, 병원이었다. 마트 결제 이력은 안 봐도 술과 안주가 뻔했다. 아버지와 술을 마실 때마다, 술이 당뇨병에 진짜 안 좋다며 그만 좀 마시라는 말을 꼭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집에 들어가는 길에 또 마트 상호로 딱 술과 안주 가격만큼의 카드 사용 문자가 날아왔다. 다음에 만나면 진짜 제대로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장례식 3일 동안 나 혼자 상주로 서있으면서 고마운 사람들이 꽤 많이 왔다 갔다. 제일 먼저 내 인생 최고로 꼽는 중학교 단짝들이 와주었고, 또 그중 하나는 첫날부터 발인 후 수목장 안치까지 쭉 함께했다. 고등학교 친구들, 국어국문과 영화예술과 사람들, 아르바이트했던 곳의 직원들, 회사 사람들. 그들은 하나같이 ‘많이 걱정했는데 그래도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아, 그중에 누군가가 이렇게도 말했었다. ‘너무 밝아 보여서 걱정된다’고.
 
 2018년 6월 13일 수요일 저녁. 10시 30분까지 야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아버지에게서 카톡이 왔다.
 ‘일욜 낮 밥먹자’
 나는 답장했다.
 ‘엉, 좋지’
 아버지와의 저녁 약속을 떠올린 것은 약속한 지 9일 뒤인 다음 주 금요일, 회사 동기들과 술자리를 가진 후 택시 안에서 카톡을 쭉 확인했던 때였다. ‘엉, 좋지’라는 답장의 읽음 표시 1은 여전히 남아있었고 바로 전화를 해봤지만 받지 않았다. 나는 까먹어서 미안하다는 답장을 남기고선 잠에 들었다.
 그다음 날 오전 9시, 나는 요란한 핸드폰 진동 소리에 눈을 떴다.
 
 장례식 2일 차, 입관식을 치렀다. 장례지도사는 시신의 부패 상태가 심각한 탓에 입관식을 처음부터 진행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끝까지 괜찮다고 했지만 친가 친척들의 만류로 입관식은 마지막 삼베를 덮는 것부터 시작했다. 아버지의 원룸을 건물주 측에서 바로 방역해버린 탓에 아버지 핸드폰 회수가 늦었고, 뒤늦게 연락을 받은 아버지 지인분들 대부분이 이날 방문했다. 수는 많지 않았다.
 아버지를 경기도 수목장에 안치하기로 결정했다. 부조금을 다 합쳐도 장례식비와 매장비에는 턱없이 모자랐고 대출을 알아보는 차에 작은 고모부가 나를 포함한 친척들을 다 불러 모았다. 큰고모, 작은 고모, 그리고 사촌누나 집까지 다 합쳐서 전 비용을 보태주기로 이야기가 끝난 상태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점심쯤에 아버지의 부검 결과를 전달받았다. 사망 추정일은 6월 16일 토요일 오전 1시. 옆에는 까만 봉투가 있었고 아직 뜯지 않은 소주와 과자 하나가 들어있었다고 했다.
 이틀 째 조문객 맞이가 끝이 나고, 장례식 3일 동안 남아 도와주기로 한 중학교 친구 A와 빈소 옆 작은 방에 함께 누웠다. A가 괜찮냐고 물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A의 손을 잡은 채로 한참을 울었다. 내가 평생 고치지도, 바꾸지도, 지우지도 못할 후회되는 일에 대해 한탄을 늘어놓는 동안 A는 묵묵히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유독 긴 밤이었다.
 마지막 날, 아버지를 발인했다. 뜨거운 가마 속에서 나온 하얀 뼈대들은 유리창 너머 분골 담당자의 테이블 위에 놓였다. 자석으로 관의 못과 기타 철가루들을 걸러내고는, 당일자에 발인한 누군가의 자잘한 유골가루들이 묻어있는 분골기에 갈려 이십 센티미터 남짓 작은 목함에 담겼다. 유골함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수목장에 도착한 순간까지도 온기가 남아있었다.
 비가 많이 내렸다. 조금 빗줄기가 약해지면 진행하려고 했지만 한 시간 반이 지나도록 변함이 없던 탓에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유골함을 들고 올라가는 내내 폭우가 쏟아졌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계단과 비탈길을 올랐다. 작은 구덩이에 유골함을 넣고 흙을 덮는 동안 속으로 빗물이 계속 들이쳤다. 마무리를 하고 내려오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비는 곧바로 그쳤고, 건너편 산듬성이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창틀에 턱을 괴고 밖을 바라봤다.
 
 지켜지지 못한 아버지와의 마지막 저녁 약속. 그리고 그 전날 새벽에 돌아가신 아버지. 내가 약속을 제대로 기억하고만 있었더라면 아버지를 더 빨리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손으로 수의를 입히고 편히 보내드렸을 텐데,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까만 비닐에 쌓인 그런 형태는 아니었을 텐데.
 나는 2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나를 원망한다. 그때는 영정사진이 될 줄 몰랐던, 어느 한 초밥집에서 별생각 없이 찍은 양손에 손가락 하트를 든 아버지의 환한 미소. 문득 가슴이 답답하고 그리운 마음이 들면 술 한 병을 들고는 집 근처 강가로 나가 사진을 켜놓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곤 한다.
 누군가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을 한 술 뜨며 말했었더라지. ‘시간이 약’이라고.
 
 ‘아들, 옛날에 소설 썼을 때 아빠는 진짜 행복했는데 아빠 때문에 포기한 건 아닐까 싶어서. 아직도 글이 좋으면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대체 언제 약발이 듣는 건지, 약효는 있는 건지도 모를 하루하루를 업무에 치여 보내던 나는, 글을 놓았던 것에 아쉬워며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말을 유언 삼아 퇴사했다. 모든 시간을 들여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고, 보잘것없지만 동인집에 참여해 시집을 독립 출판하기도 했다.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은 소설계 간지에 뽑혀 실리기도 했다. 지금은 생활비가 필요해서 일을 다시 시작했지만 의미가 퇴색될 일은 전혀 걱정스럽지 않다.
 오늘도 어김없이 카페 3층 흡연실 옆 테이블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린다. 퇴사를 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려를 표한다.
 ‘아무리 글을 잘 써도 밥 벌어먹기 힘든 게 작가라더라. 꿈에 대해 다시 잘 생각해봐라’
 그럴 때면 나는 대답한다.
 ‘작가로 성공 못해도 좋아. 난 이미 자랑스러운 아들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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