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의 증명을 위한 변명-
우리는 늘 행복해지고 싶다고 하면서도, 사실 어느 정도는 지독하게 불행해지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주변을 볼 것도 없습니다. 당장 당신만, 나만 봐도, 틈만 나면 ‘내가 얼마나 불쌍하고 불행한지’를 증명하지 못해 안달이잖아요. 얼마나 사람들이 서로 제 불행을 앞다투어 증명하는지 ‘불행 배틀(싸움)’이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타인의 동정이나 관심을 바라서인지, 어떤 회피에 대한 핑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왕 핑계를 댄 김에 한 번 더 변명해 볼까 합니다. 한편으로는 살아있음을 감각하기 위해 그럴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숨쉬기 버거울 때라야 비로소 호흡의 순간을 갈망하듯이,
행복할 때만큼이나 온전하게 생을 감각하는 순간은, 사무치게 불행할 때라서.
....... 역시 변명하는 모습은 볼품없네요.
속된 말로, 참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나의 인생을 그토록 갈기갈기 찢어 집요하게 붙들던 때가 있던가요. 언제나 못마땅하던 자신이 그 순간만큼은 몹시도 안쓰러워, 안아주지 않고는 버틸 수 없게 되고 맙니다.
그토록 생이 날카롭게 나를 찔러대는 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 할 순간이 없으니까요. 삶에서 녹슨 금속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불행을 묵묵히 감내하는 것이 어른이라면, 언제 어른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어른이 되어서도, 마치 사춘기 아이처럼 제가 얼마나 불행한지 증명하며 가시를 세우고 마니까요.
그럼에도 한참을 날카롭게 외치고 나면, 다시 천천히 삶의 고개를 들어 숨을 쉽니다. 아주 오랜만에 호흡한다는 감각을 느끼며 말이죠. 뜨거워져 메말라 버린 폐부를 서늘한 생의 감각으로, 다시.
언제고 제가 불행하다고 기를 쓰고 열변하던 순간이 부끄러운 흑역사가 될 때까지, 그래서 멋쩍고 뻔뻔하게 내가 그랬냐며 웃게 되는 때까지, 다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