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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끼 Sep 14. 2023

세상 시간에 사람 시간만 있나

시간에 살짝 새치기하는 법





 나는 세상 흐름에 곧잘 뒤처졌다. 유행하는 패션, 먹거리, 아이템, 유행어뿐 아니라 디지털 기기 사용능력이나, 각종 사회 뉴스나 조직 내 소문들에도 늘 한 발짝, 아니 열 발짝은 느렸다.

 느렸기에 남들이 다 사는 시간을 나만 놓칠까 늘 전전긍긍했다. 그 시간을 함께 살지 못하면 남들과 나의 시간이 어긋나서 결국 홀로 연결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만 지금 세상에 남겨지고 모두 저 멀리 떠날 듯한 불안함은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천만 관객 영화나, 화제의 드라마나 예능을 보지 않으면 대화에 낄 수 없을까 불안해서, 유튜브로 요약 영상이라도 찾아봤다. 

 핫플레이스에 가지 않으면 밋밋하게 사는 사람으로 보일까 불안해서, 괜히  가서 사진을 찍고 카톡 프로필에 올렸다. 

 경제 뉴스를 보고 투자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벼락거지가 될까 불안해서, 출퇴근 길에 각종 경제 뉴스나 동기부여 영상을 틀었다. 

 남들은 다 열심히 사는데 나만 뒤처질까 봐 필요도 없는 자격증 책을 샀고, 근력 운동을 해야 한다는 말에 퇴근 후 포부로 헬스장에 등록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세상을 따라잡기 위해 아등바등거렸다.


 물론 이건 제법 효과적이기도 했다. 무리해서 내는 속도감은 어쩐지 알차게 살고 있다는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는 법이니까.           


 하지만 남의 눈치로 시작한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듯, 내가 벌인 일들은 대부분 실패로, 혹은 흐지부지 끝이 나고 말았다.


 괜히 예능 아는 척했다가 그 예능이 아닌 다른 연예 예능에 나온 출연진과 섞어버린다든가, 어색하기 그지없는 모양새로 사진을 찍어서 참 멋이 없는 결과물이 나온다든가, 주식 하락으로 통장잔고의 곤두박질을 바라본다든가, 자격증 책은 한 페이지 보고 1년 동안 책장에 꽂아만 두다가 연말에 버린다든가, 헬스장 3개월권을 끊고 일주일 만에 발길을 끊었다든가…





 분명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결과가 좋지는 않았더라도) 이상하게 문득, 세상이 새삼스럽도록 깜짝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오고 만다. 같은 세상 시간에 머물기 위해 열심히 달렸는데, 그런 세상이 내가 모르는 시간으로 훌쩍 건너가 있는 것이다. 보통 그 ‘문득’은 계절이 바뀌는 순간 찾아온다.

 

 늘 열고 나오던 현관문 앞에서 문득, ‘어? 아침이 쌀쌀해졌어?!’ 하고 놀라는 늦여름이라던가.

 늘 지나치던 집 앞 시장에서 문득, 딸기향이 나서 고개를 돌리는 봄의 입구라던가.

 매일 나오던 퇴근길이 유독 어두워 하늘을 올려다보니 나뭇잎이 다 떠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는 늦가을 같은 순간들.     



 나는 그 계절에서 살았던 기억이 없는데 이미 몽땅 지나가 버렸다고? 이 새삼스러운 문득의 순간 놀라움과 함께 찾아오는 건 허망함이다. 

 “나 뭐 하고 살았지? 뭘 했다고 벌써 가을이야?”     


 그토록 시간을 꽉꽉 압축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는데 나는 왜 너무 많은 걸 놓친 기분이 들고 마는 걸까. 





 이다 작가는 <이다의 자연 관찰 일기>에서 자연에 집중하고 매일 그것을 기록하면 하루가 허망하게 지난 것 같지 않아 좋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이 세상과 시간의 흐름을 놓치고 있지 않다.”      



 내가 정말 놓치고 있는 건 유행도, 최신 뉴스도, 자기 계발도 아니었다.

 나는 계절을 통째로 놓치고 있었다.

 시사경제 뉴스를 보겠다며 출퇴근 길에 나뭇잎 색이 변해가는 걸 보지 못했던 것이다.     



 세상 시간이 사람의 시간만 있지는 않다. 너무나 많은 존재들의 시간이 함께 있다. 동물과 식물, 공기와 물 온도의 시간까지 있다. 아마도 내가 느끼는 이 공허함은 아주 일부의 일부의 일부인 사람의 세상만 따라잡으려다 정작 너무 많은 존재들의 시간을 송두리째 놓쳐버린 데에서 오는 허망함일지도 모른다.



 다행인 점은, 이 다양한 존재들의 시간은 갑자기 중간에 ‘나도 좀 낄게요’하고 비집고 들어가도 언제든 자리를 내어준다는 것이다. 올해 봄, 여름을 몽땅 다 흘려보냈다고 해도 언제든 다시 바싹 마른 낙엽을 밟을 수 있도록 해준다. (적어도 인간이 오염으로 세상을 몽땅 없애버리기 전까지는 그럴 것이다.) 


 그러니 염치없지만 이들의 세상 시간에 슬쩍 새치기를 해본다. 새치기 방법은 간단하다. 내일은 살짝 쌀쌀해진 아침 공기를 깊게 마시며 집 근처 공원 산책을 나가면 충분할 거다.


  헬스장 3개월보다야 훨씬 가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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