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M브랜드는 엄마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브랜드였다. 북유럽 풍의 귀엽고 중성적인 이미지라, 해외직구를 하는 엄마들 사이에서도 국내 브랜드인지 모르고 입힐 정도였다. 그런 브랜드가 우리 백화점에 입점하기만 하면, 집객 효과는 물론이고 그간 실적이 안 좋던 매니저들도 교체가 가능했다. 40여개의 점포 중 35등을 전후하는 후진 환경의 백화점이었지만, 내가 맡은 카테고리의 전체 매출을 성장시킬 방법을 찾아야 했고, 이 브랜드 입점은 나에게 기회였다. 몇 번 마주쳤던 해당 브랜드 영업담당과 MD와 미팅을 하며 입점 위치를 조정했다. 어차피 일부 공실이 있는 상태여서, 한두 개 브랜드만 위치를 조정하면 브랜드가 원하는 위치를 내주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MD교체 후 실적도 집객성도 보장된 브랜드 교체였다. 문제는 단 하나. 지점장을 설득해야 했다.
그간 단 한번도 브랜드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던 지점장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굳이 왜 브랜드를 교체하냐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브랜드 입점과 교체에 대해 보고할 때면 허허 웃으며 알아서 하라는 지점장이다. 이후의 매출실적 예상이나 회수율을 정리하여 보고 드려도 닫힌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가장 큰 난관이 아군을 설득해야 하는 거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명분이 없지도, 이후 실적이 문제가 되지도 않을 A급 브랜드를 넣으면서 아군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지점장을 설득해야 한다니.
지점장님은 다른 대기업에서 부장까지 지내다 온 분이었다. 우리 회사로 넘어오실 때 회사에서 ‘이사’를 제안했으나 고사했다고 했다.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이사’는 계약직이라 잘릴 수 있어서 그럴 거라고 답해주었다. 정년이 길게 남지 않은 지점장에겐 월급보단 명함이 중요했다. 오랜 날 오랜 밤이 지나는 동안 가급적 조용히 지내다 마무리 짓고 싶을 마음이 이해가 안되지 않았다.
브랜드는 거저 바꿔지지 않는다. 매장을 예쁘게 만들기 위해 바닥을 다지고, 인테리어를 해야 한다. 천장에는 반짝반짝 조명을 달고, 새로운 마네킹과 집기를 가져다 놔야 한다. 이 것은 모두 돈이 든다. 해당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브랜드를 교체할 때는 그래서, 해당 비용을 얼마의 시간이 걸려야 회수할 수 있을지 보고서를 작성한다. 문제는 언제나 투자 시점과 회수 시점의 시간차다.
브랜드 입점시 VP시안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지점장에겐 굳이, 일을 벌여 이후의 실적을 도모할 여유가 없었다. 아니 정년이 아니라도 한번 잘릴 뻔 했던 지점장은 비용을 들여 내년의 성장을 기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당신이 있는 동안, 무사하고 태평하게 그저 파도 없이 물이 흐르듯 그렇게 시간이 흐르기를 바랄 뿐이다.
나 역시 내가 투자하거나 노력한 시간이나 업무의 결과를 내가 가져오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내가 떠난 후라도 실적이 좋아지면, 남아있는 매니저나, 혹은 맡은 누군가에게는 당연히 좋을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있었던 매장이, 점포가, 회사가 조금씩 발전해나가리라 믿었다. 마치 지금의 세대가 다음 세대를 키워가듯이. 이 것이 그간 내가 일해온 동력이었다. 그리고 그 어느 시점의 누군가는, 내가 한 일을 기억해줄지도 모를 일이다.
지점장님은 그의 최선을 다했다. 그 최선은 그에게 몇 년간 월급을 더 받게 해주고, 그의 명함을 유지시켜주며, 50이 넘어 그의 많은 친구들이 은퇴를 당한 시점임에도 그에게 출근할 장소를 제공해주었다. 나의 최선은 그런 지점장님 맡고 있는 백화점의 매출을 높여주고, 불성실한 매니저나 직원을 교체하여 고객들에게 조금 더 쾌적한 쇼핑환경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매출이나 쇼핑환경개선 등의 일은 그 개인에게는 최선이 아니었다. 점차 무언가는 발전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일해오던 나의 최선이, 누군가에게는 귀찮고 신경 쓸 일이 많아지는 잡무일 수도 있었다. 과연 나는 그에게 개인의 안위보다 회사가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국 나는, M브랜드를 입점시킬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