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새우며 짜낸 매출목표 수립이 던져준 질문
유통의 가을은 유독 바빴다. 9월이 되면 사람들은 이미 가을을 넘어 겨울 준비를 시작했고, 많은 백화점은 대규모 세일을 준비해야 했다. 추석 전을 잘 준비하지 못하면 3분기뿐 아니라, 연간의 매출이 무너질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내년의 성장동력도 같이 챙겨야 했다. 전체 브랜드에 3개년치 실적을 뽑아주었다. 전전년, 전년을 비교한 성장률과 매출, 전년과 당해를 비교한 성장률과 매출 그리고 주요 행사를 정리해 주었다. 한 층에는 40여 개의 브랜드가 있었는데, 하루에 5개씩 매니저를 만나 상담을 해도 한 주일이 넘게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너무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급하지 않은 과정이다 보니 다른 일상업무에 치여 미루기도 잘 미뤄졌다.
“아니 매니저님! 작년 행사는 3월에 했고, 올해는 4월에나 상품이 입고된다면서 4월 매출 목표를 3월보다 낮게 잡으시면 어떻게 해요~ 3월은 신학기가 있으니까 당연히 매출이 성장하겠지만, 4월에 상품확보하고 행사해서 매출을 끌어올려야 5월까지 성장세가 이어지죠”
말도 안 되는 말을 말이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면, 매니저들은 갑자기 또 수긍하였다. 나와 한 대화를 본사와 소통하면서 말하면, 본사는 또 그 나름대로 설득되는 것 같아 보였다. 백화점의 매출 규모나 컨디션이 나쁘지 않아서, 노력을 조금만 해도 행사 상품을 확보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 ‘조금의 노력’은 이런 식의 계속된 대화와 설득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각 매니저, 본사의 영업담당/팀장을 만나며 진행된 대장정의 목표 합의가 거의 끝을 보일 때 즈음, 문득 한 가지 질문이 나의 심장에 꽂혔다.
“내 삶은? 나는 내 삶을 매 월, 매 년 성장시키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있을까? 내 삶도 성장하고 있는 것일까?”
한 달을 넘게 매니저들과 실랑이하고 각 본사와 영업하며 매출목표를 위한 숫자를 만들어 놓는다고 하면서, 정작 내 삶의 이정표는 어떻게 세우고 있는 것일까? 각 각 브랜드의 매출 성장을 위해서는 매니저들과 각 월의 행사, 전년 행사를 비교해 가며 월간, 연간 매출 목표를 세우고 있으면서, 과연 나의 삶은 그러한 계획을 갖고 전년보다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는 한 걸까? 내 삶은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을까?
갓 태어난 생명체는 매년 무럭무럭 자란다. 어른이나 주위의 도움으로 각 시기에 맞는 영양분을 섭취하고, 적절한 운동이나 학습을 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자라나는 것이 보인다. 8살에는 초등학교에 들어가 사회생활을 배우기 시작하고, 중고등학교에서는 극심한 사춘기를 지나며 정신적으로 그 부모세대와 분리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이런 어린 시절의 성장은 키, 몸무게, 학년 등 숫자가 달라지는 것이 너무도 명확하게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의 때가 지나면, 성장은 점차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우린 더 이상 ‘성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나의 ‘나아짐’은 과연 어떠한 말로 불려야 할까? 더 이상 ‘성장’을 말하지 않음은 우리가 성장하지 않아서일까?
나의 삶은 분명 어떠한 부분에서는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다. 어떠한 생각은 무르익고, 어떠한 마음은 단단해져 흔들리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어른의 삶은, 그 성장을 말할 수 있는 지표 자체를 찾기 어렵다. 키나 몸무게처럼 잴 수도 없고, 마음의 깊이를 헤아려보기도 힘들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나아짐’을 알 수 있을까? 아무도 어른 이후의 삶에 대해 '옳은 길’이나 ‘정답’을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어떠한 부표를 보며 항해해야 할까?
갑자기 무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