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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 Dec 24. 2022

너 장모님 닮아가는 거 알아?

남편의 한마디에 오열한 이유




 그날도 역시 아침부터 엄마와의 전화통화로 시작다. 무슨 일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퍽한 고구마를 물도 없이 먹은 것처럼 답답했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일상은 해내야 했기에 소민이를 학교에 보내고 운동하고 청소를 하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읽었던 것 같다.


 감정의 정리가 시급했다. 엄마에 대한 풀지 못한 묵은 감정에 새로운 갈등이 더해가니 이제는 꾹꾹 눌러 담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찌어찌 하루를 보내다(버틴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밤이 되면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던 날들이었다. 눈을 뜨면서부터 감을 때까지 내 모든 신경은 엄마를 향해 있었다.






 하교한 아이의 책가방 속을 보고 한숨이 나왔다. 특히 필통이 항상 못마땅했다. 필통 속에 있어야 할 지우개와 연필은 하교 후엔 늘 가방 옆주머니 앞주머니 신발주머니 등 여기저기 던져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잃어버리는 일도 많아서 하루가 멀다 하고 새 지우개를 챙겨 넣어주어야 했다. 솔직히 나의 어릴 적 모습과는 닮지 않은 딸아이 이해할 수 다. 지우개 없이 고생을 해봐야 제대로 잘 챙겨 다닐 거라는 생각에 지우개를 사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작은 사건이었다. 하루에 일어나는 아이와의 실랑이 99가지 중에 하나였을 거다. 보통은 좋게 넘어가던 일인데 유독 그날은 필통 때문에 화가 난 내 마음이 잘 풀어지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고자 육아서적을 뒤적이는 중에 남편이 귀가했다. 남편의 표정도 지쳐 보였다. 이런 날은 대화보다는 각자의 쉼이 우선임을 알기에 굳이 말하려 하지 않았다. 덮어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남편은 재차 물어왔다.

 


"무슨 일 있었어?"


"지우개를 항상 잃어버려 속이 터져. 새로 사주기도 싫어. 언제 제대로 챙겨 다니지? 여자애들은 야무지다는데 소민이는 안 그래. 심각해 진짜. 지우개 넣어주지 말까 봐. 고생해봐야 잘 챙기지."


참으려 했는데, 터져 나와 버렸다.

말하면서도 후회가 되었지만 남편은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 생각했다.



"샘, 니 장모님 닮아가는 거 아나?  소민이가 지우개를 왜 못 챙기는지 물어봤어?"




 눈에서는 눈물이 차올랐다.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돌아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술에 취한 남편은 금세 곯아떨어졌다. 남편은 잠들고 나는 밤새 울었다.

 


 아이를 키우는 9년의 시간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오직 엄마와 같은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애쓴 일뿐이었다. 내 안에 쌓인 엄마의 흔적이 내 딸 소민이에게 전가되지 않기를 바랐다. 소민이가 부모에게 상처받은 마음을 갖지 않은 어른으로 자랐으면 좋겠다는 소망 하나로, 그렇게 노력을 해왔었다. 그런 나에게, 남편의 그 한마디는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주기에 차고 넘쳤다.



 엄마와 닮은 모습을 스스로 느낄 때마다 흠칫 놀라곤 한다. 사실 엄마가 20년을 키워주셨는데 닮은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나에게는 엄마의 생활습관과 말투, 사고방식 등이 배어있다. 엄마에게 받은 상처가 많은 것은 분명하지만 비단 단점뿐인 엄마였을까. 엄마는 장점도 많은 분이다. 닮고 싶은 점은 배우고 상처를 주었던 엄마의 단점들은 내 안에서 도려내려 죽을힘을 다하며 산다. 일상 속에서 특히 소민이를 키우며 매 순간 올라오는 감정을 자기 검열하고, 어릴 때 받았던 부정적인 언어들이 나오려고 할 때마다 삼킨다. 더 좋은 말과 감정들로 채우기 위해 육아서적을 읽고 매일 오은영 선생님의 육아회화(오디오클립)를 귀로 듣고 입으로 따라 하며 체득하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나도 아이의 마음을 묻지 않고 있었다. 내 기준과 생각대로 판단하고 훈육하려는 모습이 엄마를 닮아 있었다.



 나의 우군이라고 생각하는 남편이, 나를 어쩌면 나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말이라 더욱 아파왔다. 그냥 넘길 수는 없는 말이었다. 내가 소민이에게 하는 노력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의 말이기에 돌아보아야 했다. 찢어질 듯 아프지만 내 한계를 인정하고 되돌아봐야 했다. 또한 소민이는 예민한 기질의 아이였다. 내 언어뿐만 아니라 미세한 표정 변화조차 모두 알아채는 딸이다. 남편을 똑 닮은 소민이는 어쩌면 숨긴다고 애썼지만 숨겨지지 않은 내 안의 부정적 시선, 판단, 비판을 전부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내 안에 엄마와의 해결되지 못한 상처와 어두운 감정들이 나에게 버려지다 못해 흘러넘쳐 쓰레기가 되어, 내 옆에서 함께 살아가는 소중한 남편과 딸아이에게도 쏟아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 겪는 통이라고 생각했는데,  옆에서 남편도 아이도 애써주 아하며 함께 겪어내고 있었다. 



 남편의 취중진담은 심각한 자기 연민에 빠져있던 나를 건져 올릴 수 있었다. 어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엉켜있는 감정은 풀어내고 잘라내어 정리해야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아프고 겁이 나서 꺼낼 수 없었던 내 안의 상처들을 마주해야만 우리 가족이 가면 없이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글쓰기로 나와 마주하면 엄마와의 직접적인 대면 없이도 엄마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은 엄마가 무섭다.








"소민아. 필통을 정리하는 게 잘 안되니? 어려운 건가?"


"빨리 가방 싸놓고 점심 먹으러 가야 되거든. 그래서 대충 빨리 넣는 거야. 내가 좀 느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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