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쓴 글자와 숫자와 그림들이 완벽한 이유
나는 아이들이 서툴게 쓰는 글자가 좋다. 완벽하지 않은, 그래서 미완의 그 단어가, 숫자가, 그림이 좋다.
그것들은 틀렸기 때문에 더없이 사랑스럽다. 그리고 귀엽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아서 더 좋을 때 귀엽다는 표현을 쓰지 않던가.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틀린 것을 고쳐주지 않을 때가 많다. (사실 학교 숙제가 아닌 이상 고쳐주지 않는다.) 나는 그 순수한 귀여움을 더럽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틀렸기 때문에 완벽하게 귀여운 그것을 내가 고쳐주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완벽하게 귀여운 것이 아니게 된다. 틀린 것을 맞게 고쳐 주면 완벽한 것이 완벽하지 않은 것이 되는 아이러니.
누군가는 말했다. 귀여우면 끝나는 거라고. 그 말은 누군가를 귀여워했다는 것은 그에게 다른 어떠한 결점이 있어도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즉, 귀여워 보였다는 것은 상대의 마음을 전부 얻게 된 것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귀여움이란 그렇게 강력한 것이라는 얘기다. 대표적인 예로 아기들을 들 수 있다. 아기를 키우는 것은 내 몸과 영혼을 갈아내는 작업이긴 하나, 아기는 귀여움으로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할만한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결국 아기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생존 무기는 귀여움이라 할 수 있다. 그렇듯 귀여움은 모든 것을 이기는 큰 힘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그러한 강력한 귀여움은 완벽하지 않은 데서 온다. 아이의 삐뚤빼뚤한 그림. 뭐가 뭔지 말해주지 않으면 그것이 무엇 인지도 인식하기 어려운 미완성의 그것은 따라 그리기도 어려운 그만의 순수한 귀여움을 가지고 있다. 완벽과, 정답과, 사실과 다를 때 비로소 그것은 완벽히 귀엽다. 하지만 ‘일부러‘ 사실과(정답과) 다르게 그린 것은 귀엽지 않다. 그것은 귀여울 순 있으나 완벽하게 귀여울 순 없다. 결국 정답이나, 사실, 완벽을 모르고 틀려야 귀여운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아이들은 사실을, 정답을, 완벽을 모르기 때문에 완벽하게 귀여운 것이고 순수한 것이 된다.
어쩌면 우리는 완벽을(정답을, 사실을) 바라지 않는다. 완벽은 불가능하고, 현실은 아프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는 이가 주는 귀여움은 우리에게 기쁨이요 행복이 된다. 그 불완전이 주는 완전한 기쁨. 아이는 부모에게 그런 존재다. 오늘도 너의 불완전이 나를 완전하게 행복하게 하니. 어쩌면 너는 있는 그대로 완전한 것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