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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새미 Jul 25. 2022

공주 같은 엄마

네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너에게로 가서 공주가 되었다.

딸아이가 오늘 갑자기 대뜸 나에게 "엄마 공주 같았어!"라고 하는 것이었다. 에?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었다. 그 말을 듣고 있을 당시 나의 모습은 이러했기 때문이다. 오전에 운동을 다녀오고 씻지도 못해서 땀을 잔뜩 흘렸던 티셔츠에 후줄근한 실내복 바지, 머리는 집게 핀으로 대충 올려 묶고 맨얼굴에 겨우 눈썹만 간신히 그려 넣은 데다 새로 산 이케아 책장을 조립한 후라 기력이 쇄 해 멍한 상태였다. 그런 나의 몰골이라 함은 공주가 아니라 공주 옆의 시녀도 시켜주지 않을 것 같은 꼴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공주 같다니?

가만, 다시 생각해보니 과거형이었던 것 같다. (사실 현재형이었는지 과거형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멍한 상태로 아이의 말을 흘려듣고 있던 것이다.) 과거에 내가 공주 같을 때라 함은... 아하!!


지난 주말 둘째의 돌잔치가 있었다. 그래서 온 가족이 곱게 전통한복을 차려입었더랬다. 5살짜리 첫째 딸은 그런 한복이 '공주' 같다며 좋아라 했다. 식당에 가서 갈아입어도 되는데, 굳이 집에서부터 입고 가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있는 이유는 한복이 주는 '공주 같은' 느낌이었으리라. 긴 치맛자락을 펄럭이는 그날의 내 모습도 아이에게는 공주 같았었나 보다.


그런 깨달음이 있고 난 후,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여름이 생일날 엄마 공주 같았어?" 아이는 "응!"하고 대답한다. 그제야 이해가 되어 고맙단 인사와 함께 "가을이도 공주 같았어!"하고 답례를 했다.


그러고는 저녁 시간이 되어 온 가족이 앉아 식사를 하면서 남편에게 낮에 있던 일들을 소소하게 나누다가 그 이야기도 꺼내게 되었다. "여보 가을이가 여름이 돌잔치 날 나 공주 같았데~"했더니, 옆에 앉아 있던 딸이 갑자기 내 말을 정정한다.


"아니~! 엄마 지금도 공주 같다고!!"


에에?? 그럼 아까 그 말이 과거형이 아니었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몰골은 저녁 때도 여전히 같은 상태였다.) 수줍게 고맙다는 말로 마무리가 된 대화였지만, 괜히 그 말이 두고두고 고마웠다. 내가 어디 가서 (이런 몰골로) 공주 같다는 말을 들어보겠는가. 아이가 별 뜻 없이 뱉은 말일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니 아이에게 나는 '공주처럼' 귀하게 여겨질 때가 많았다. 오늘도 거실에 누워 첫째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는 나에게 기어와 들고 있던 형광펜으로 냅다 얼굴을 가격하는 둘째에게서 나를 감싸 안아 보호해주고, 아프다는 말에 입으로 호호 입김을 불어주던 딸.


그래, 네 덕에 나는 내가 (공주처럼) 귀한 사람임을, 중요한 사람임을 잊지 않게 된다. 육아나 가사를 하다 보면 예쁘게 꾸밀 일도 없을뿐더러 내가 중요한 일을 하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에 서글퍼질 때가 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반복된다고 말하기엔 매일이 챌린지일 때가 많지만) 꾸준하게 감당해야 하는 가사노동이나 육아노동은 사실 내 성미랑 잘 맞지 않아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잘 살고 있는 건가.' '이게 맞는 건가.' 하며 별 생각을 다 하곤 하는데, 네 덕에 내가 버틴다.


지금도 공주 같다는 네 말에, 오늘 하루를 내가 아주 잘 산 것만 같다. 나는 공주 같은 사람이다. (적어도 너에게는) 그래, 그걸 잊지 말아야지. 고마워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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