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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새미 Aug 18. 2022

해바라기가 운다면

내가 아이 둘을 키울 수 있었던 이유

나는 꽃 중에서도 해바라기를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해바라기를 키워보려 몇 번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해바라기 씨를 심어본 적이 두어 번.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주 작은 꽃을 한송이 피워본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금방 죽고 말았다. 씨를 심어 키웠더니 싹은 잘 나지만, 줄기가 가늘게 키만 쑥 크다 보니 맥없이 꺾이기 일쑤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모종을 사기로 했다. 그래서 얼마 전 테디베어 해바라기 모종을 샀다. 한 뼘이 채 되지 않는 아기자기한 모종이 6개. 큰 화분까지 사서 3개씩 나눠 심었다. 모종은 어느 정도 자란 상태로 키우기 시작하니, 꽃만 잘 피우면 되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쉬운 일일 것이라 생각한, 금방 꽃을 피울 것이라 생각한 것은 나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너무 쉽게 요행을 바랐던 나의 욕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나는 원래 식물을 잘 기를 능력을 갖지 못한 탓이었을까. (예전에 누군가 그러셨다. 40이 넘으면 식물을 안 죽이고 잘 키울 수 있게 된다고. 내가 아직 그 나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모종들은 결국 꽃을 피우지 못하고 죽었다. 나는 왜 또 실패했던 것일까? 아마도 물을 너무 많이 주었거나, 너무 적게 주었거나 둘 중 하나였을텐데...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나는 속상하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며 또 한 번 한 생명을 길러내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니 신기하다. 내가 지금까지 두 생명을 이렇게 길러내고 있는 것이 말이다. (나는 애가 둘이다.) 해바라기 모종 하나도 잘 키워내지 못하고 죽이는 내가 어떻게 아이들을 키워내고 있는 것일까? (잘 키웠다고 말은 못 해도 적어도 아직 둘 다 잘 살아있으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졸려서 안아달라고 울면서 온 집안을 기어 다니는 둘째가 눈에 들어온다. 끝까지 나를 쫓아다니며 안아줄 때까지 울고우는 아이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내가 아이를 지금까지 키울 수 있었던 건, 아이가 나를 향해 울었기 때문이구나!'


내가 어떠한 능력이 있고, 아이들의 요구를 잘 알아채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이 자기 요구를 들어달라고 나에게로 와서 울기 때문이다.


엄마가 되고 제일 힘든 것 중에 하나가 그거였다. 내가 육아를 하면서 가장 신경이 곤두서고 금방 이성을 잃게 되는 순간도 늘 그거였다. 아이의 울음. 집안이 떠나가라, 울음을 내뱉는 당사자인 아이조차 넘어갈 듯이 우는 그 울음.  내 귓가에 울리면 머리가 아니라 심장으로 가 내 심장을 쥐고 흔드는 그 소리. 첫째 때는 유독 더 힘들었다. 왜 우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던 초보 엄마는 그 울음에 화도 내 보고 같이 울어도 보았더랬다. 아이가 울면 그 소리를 멈추기 위해 갖은 애를 썼더랬다. 어쩌면 아이가 아니라 내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아이의 울음이 실은 내가 그 아이를 키울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생각하니 웃기다. 


근데 생각할수록 맞는 것 같다. 아이가 울어서 제때 (아이가 원할 때) 밥을 먹이고, 잠을 재우고, 기저귀를 갈아주었던 것이다. 아이는 자기가 필요한 것을 나에게 친절히 그리고 일일이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 방식이 울음이라 힘들었지만, 울음이 아니라 다른 방식이었다면, 예를 들어 웃음이었다면 나는 아이의 요구를 제때 들어주었을까? 아니었을 것 같다. 생각할수록 탁월하고 유일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언어를 터득하게 될수록 아이는 울음을 말로 대신한다. 그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해바라기도 울었더라면 나는 적어도 그 해바라기 모종들을 몽땅 죽이지는 않지 않았을까. 목이 마르다고 울었더라면, 그만 먹고 싶다고 울었더라면 내가 적당한 양의 물을 맞춰 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해바라기도 아이처럼 울었더라면 말이다.


화장실 문 앞에 앉아 엉엉 우는 아이를 안아 올리니 아이는 울음을 뚝 그친다. 아이의 요구사항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새삼 그렇게 울어주는 아이가 고맙다. 나는 신도 아니고, 심령술사도 아니니 다른 이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저렇게 내가 모를 수가 없게 알려주니 나는 네 맘을 알아주기 편하다. 물론 울어도 너의 마음을  맞추지 못할 때도 있고, 이것저것 다 시도해 본 뒤에야 뒤늦게 너의 마음을 알게 될 때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와서 울고 울고 우는 것을 듣고 듣고 듣다 보면, 특별하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곤 나는 너의 마음을 대략 다 알게 된다. 너의 울음으로 내가 배우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는 것이다.


'내가 너를 키운 줄 알았는데, 네가 울어서 내가 너를 키울 수 있게 된 것이구나.' 


테디베어 해바라기를 보내고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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