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새미 Nov 02. 2022

너의 힘듦을 인정하자, 나의 힘듦이 줄어들었다.

다시 찾아온 '육아 번아웃' 극복기


남편이 독일로 일주일간 출장을 다녀오는 동안 독박 육아를 했고,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온 뒤로는 연이어 나와 아이들이 줄줄이 열감기를 독하게 앓았다. 감기로 떨어진 컨디션은 좀처럼 회복되지 못했고, 결국 육아 번아웃이 왔다. 그 와중에 공원 벤치에서 떨어지는 아이를 붙잡으려다 손톱이 들려 아직도 고생 중이고, 아이를 평이 좋은 어린이집에 보내려고 맞벌이에 도전해보려다 현타를 세게 맞았다. (텅텅 비어 있는 이력서가 나의 가치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설상가상 나의 육아에 가장 큰 도움을 주시는 친정엄마는 치매를 앓고 계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돌보는 일에 바빠지셔서 왠지 모르게 기댈 구석까지 줄어든 느낌이었다. 이 모든 것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내가 내 가족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도 왠지 내 능력 부족인 것 같아 나 자신이 밉다가도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내 가족들이 밉기도 했다. 


이렇게 번아웃이 오자, 나는 나의 고통에 집중하느라 좀처럼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되뇌는데 온 정신을 쏟게 되고, 그러다 보면 이렇게 내가 힘들게 된 이유를 내가 아닌 밖에서 찾으려고 애쓰기도 했다. (그 이유를 나에게서 찾는 것은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가정주부다. 가족들을 돌보는 것이 나의 주된 업무이니,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자연스럽게 가족들 탓으로 돌리게 된다. 이가 나느라 아파서 유독 보채는 아이 탓을 해보기도 하지만, 작디작은 아이를 탓하다 보면 결국 나만 몹쓸 엄마가 된다. 그러니 언제나 가장 큰 화살은 남편에게 향한다. 나와 이 육아에 공동책임이 있는 사람. 


나의 고통에 온 정신을 쏟고 있는 나는, 계속해서 너보다 내가 더 힘든 이유들을 찾아낸다. 한 번도 상대의 입장은 되어보지 않았으면서, 내가 더 힘들 것이라 확신하며 내가 이렇게 힘들게 된 것 또한 너의 책임이 크다고 여기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러한 전개는 언제나 상대를 당황케 한다. 고로 건설적인 대화가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얼마 전, 번아웃이 온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남편에게 내 감정들을 쏟아냈다. 결국 내가 쏠루션이라고 제시한 것은 나의 자유시간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의 자유는 고려하지 않은 나만의 자유였다. 남편은 그것이 못내 불편했지만 내가 너무 힘들다 하니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의 힘듦을 토해냈고, 일주일에 두 번 자유시간도 얻어내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 알게 모르게 쌓여있던 분노가 사라지지도 않았고, 그렇게 얻은 자유가 전혀 기쁘지도 않았다. 자기도 자유시간이 필요하다는 남편을 외면하고 얻어낸 것이기 때문이리라. (네가 아이들 없이 보내는 모든 시간이 나에게는 자유처럼 보인다고 일축했다. 예를 들면 출근시간마저 나는 부러운 지경이라고...) 불편하게 끝난(하지만 마무리되지는 못했던) 대화를 밤새 곱씹다 결국은 너의 힘듦을 인정하는 것으로 소화를 시켰다. 놀랍게도 그렇게 소화를 시키고 나니 속이 편안해졌다. 다음날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네 말이 맞다고, 나만 자유시간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에 하루씩 둘 다 자유시간을 갖자고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상대의 힘듦(노고, 노력, 애씀, 고생)을 인정하고 나자 나의 힘듦이 상당수 사라졌다는 것이다. 남편에게 향해 있던 이유가 불분명하던 분노들도 사라졌고, 남편과 나눠가진 덕에 반으로 줄어든 자유지만 이전의 자유보다 그 자유가 더 기쁘고 편안해졌다. 나만 이 가정을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둘이 함께 애쓰고 있다고 생각하니 좀 더 버틸 힘이 생겼고, 내 마음의 기댈 구석도 늘어났다. 계속해서 힘든 일들이 연속되어 이 번아웃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는데,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사실이. 원래 사실이었지만 내가 인정하지 않았던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드디어 나는 바닥을 치고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이앓이를 하는 아이는 낮이고 밤이고 울며 보채고, 내 손톱도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멀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니, 마음이 넓어져 이 모든 상황들이 전보다는 덜 힘들게 다가온다. 나만 힘들다 생각할 때는 억울하고 화가 났는데, 같이 힘들었다고 생각하니 서로 더 으쌰 으쌰 하게 됐다. 그랬다. 새삼 가정은 부부 두 사람이 꾸려나가는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실감 난다. 두 사람이지만 한 가정 속에 함께 있으니 한 사람만 괜찮아진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 다 괜찮아져야 제대로 굴러가는 것이다. 자전거 바퀴가 하나만 바람이 빠져도 제대로 굴러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부부 두 사람 다 바람이 빵빵하게 들어가 있어야 그 가정이 안정적으로 미끄러지듯 굴러가게 되는 것이다. 그 당연한 사실이 나와 부부로 있는 너에게로 시선을 돌려, 너를 인정하고 나니 퍽 선명하게 다가온다.


지난주, 첫째에게 물었다. “가을아~ 엄마는 여름이(둘째 이름) 키우는 게 너무 힘든데 어떡하지?ㅜ” 첫째의 대답은 의외였다. “나도! 나도 여름이 키우는 거 힘들어~“ 순간 실소가 나왔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첫째도 힘들었겠다 싶다. 둘째가 울고 떼써서 예민해진 내가 결국은 첫째에게도 날카로워지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점이 힘드냐 물으니, ”밥 먹여주는 건 재밌는데, 같이 자는 건 힘들어. “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둘째는 밥은 잘 먹는 편인데 잠투정이 심한 편이다. 첫째는 그걸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 육아현장에서 너도 함께 힘들었겠구나... ’싶다. 근데 나만 힘든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니 왠지 묘하게 위로가 됐다. 5살짜리 딸이 (그 딸도 사실 나에게는 육아의 대상인데) 본인도 힘들었다니 순간 동지애를 느낀 나도 웃기지만, 왠지 그 말이 ’ 힘든 게 당연해! 나도 힘든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내 힘겨움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긍정의 말. 그건 왠지 모를 위로였다. 


그것이 위로가 됐던 이유는, 내가 첫째가 힘들었다는 말을 나 스스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 너도 힘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놀랍게도 너의 힘듦은 나에게 위로가 된다. 그리고 그 위로는 나의 힘듦을 순식간에 반감시켜준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남편을 인정함으로 얻은 위로는 딸아이가 주는 위로보다 훨씬 강력했다. 남편에게 느끼는 동지애는 가히 전우애라 할 만큼 강력하기에 더 힘이 되는 것이었다


남편에게 고맙다. 언제나 나를 위해 애써주는 사람. 왜 나는 힘들 때마다 자꾸만 그대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는지... 왜 나만 힘들다고 생각하며 억울해했는지... 그런 나의 어리석음마저 그러려니 해주는 사람. 그런 그대 덕에 버틴다. 힘들지만 버틸 수 있게 된다. 길었던 이번 번아웃은 이렇게 극복하게 되었다. 너와 나의 바퀴에 바람을 불어넣자. 그리고 다시 열심히 굴러가 보자. 우리 둘이, 아니 넷이 함께.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라는 직업에서 이직하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