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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새미 Dec 07. 2022

엄마라서 못하는 것.

이모도 되고 할머니도 되는데, 엄마는 안되는 것.

둘째는 잠투정을 제법 하는 편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생각해보니 개월 수가 지날수록 그 잠투정도 많이 줄어들긴 하였지만ㅋ) 졸리면 짜증을 내며 안아달라고 쫓아다닌다. 바로 안아주면 잦아들지만, 집안일이라도 하며 바로 안아주지 않으면 안아줄 때까지 쫒았다니며 눈물 콧물을 쏙 뺀다. 안아줘도 바로 잠드는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요구 사항이 많고, 옆에 누워 재우려면 한참 동안 뒤척거림을 참고 인내해주어야 한다. 이렇듯 신생아 때부터 재우는 게 일이었던 것이 둘째다. 그런데 얼마 전 너무 황당한 일을 겪었다. 내가 첫째 유치원에 책을 읽어주는 활동을 가야 해서 동생에게 (아이에게는 이모가 된다.) 둘째를 맡긴 적이 있었다. 마침 그 시간이 아이가 오전 낮잠을 잘 시간이라 보챌 것이 예상되었지만, 나는 동생으로부터 뜻밖의 사진을 받아보게 되었다. 


그것은 아이가 장난감들이 있는 방에서 혼자 엎드려 잠이 든 사진이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졸려서 안아달라는 걸 한차례 거절하고 안아주지 않았더니 그냥 방에 들어가 혼자 놀다가 저렇게 바닥에 엎드려 잠이 들어버렸다는 것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절대 절대 그렇게 잠들 아이가 아닌데? 이게 무슨 일이지? 오늘 진짜 너무 피곤했던 건가? 그야말로 황당하다는 표현이 딱 맞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날의 어이없는 낮잠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이는 다음번 이모에게 맡겨진 날에도 책장 앞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이번에는 심지어 안아달라고 오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쯤 되니 동생이 무슨 마법이라도 쓰는 것인가, 진짜 낮잠 잘 때마다 동생을 돈 주고 고용해야 되는 것인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어떻게 나에게는 졸리면 안아달라 생떼를 쓰던 아이가, 바닥에 엎드려 혼자 잠이 든 단말인가. 아 이 방법을 어떻게 배우지? 내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한 걸까? 알아내고 싶다. 알아내고 싶다... 정말 간절히 알고 싶다... 하며 고민을 해보았다.


그런데 나는 엄마라서 안 되는 것이었다. 아이를 잘 키우려면 옆집 아이 대하듯 하라는 말이 있다. 너무 잘해주지도, 너무 혼내지도 말고 의연하게 대하는 것이 좋다는 말인 것 같다. 그런데 엄마는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여러 아이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울어도, 이상하게 내 아이 우는 소리만 그렇게 귀에 거슬리는 게 엄마다. 아이의 요구에 신경을 안 쓰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사실 그렇다고 모든 요구를 원하는 대로 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거절할 때도 많고, 집안일을 하느라 첫째를 봐주느라 뒤로 미룰 때도 많다. 그런데 아이는 유독 엄마에게 더 강력하게 요구한다. 이모에게는 한두 번 안아달라 하고 안 안아주면 그만이지만, 엄마는 아니다. 엄마니까 더 당당하게 더 끈질기게 요구한다. 그에게  자신이 그럴 자격이 된다는 것을 아이는 본능적으로 아는 것일까? 엄마가 자신을 무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일까? 아이는 엄마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모가 아이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아이는 이모에게는 그렇게까지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안아서 재워주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 그건 이모지 엄마는 아니다. 엄마인 나는 결국 아이의 잠투정을 받아주었었고, 그래서 아이는 엄마에게 더욱 잠투정을 부렸는지도 모른다.


첫째는 5살에 접어들면서 ‘공주’에 눈을 떴다. 그 나이대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아이는 5살 후반에 접어들자 핑크, 공주, 레이스, 반짝이, 치마, 발레 쪽으로 취향을 확고하게 틀었다. 나는 원래 핑크색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여자는 핑크색'이라는 틀(예를 들면 여성전용 주차장은 핑크색으로 표시한다.)에 대한 반항심까지 더해져 아이 옷을 사러가도 일부러 핑크색이나 레이스, 치마는 피하고 어떤 때는 남아 옷 코너에서 옷을 사준 적도 많았다. 5살 초반까지만 해도 아이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심지어 직접 옷을 골라 입기 시작한 시기에도 스스로 공룡이 그려진 남아 옷 코너에서 옷을 고르기도 하는 아이였다. 그런데 5살 후반에 접어들자 아이는 친구들이 좋아하는 공주 만화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모든 옷과 장난감, 물건들에서 핑크색에 대한 강한 호감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설득도 해보았지만 통할리 만무했다. 


핑크색이 하나도 없던 아이의 옷장은 어느새 핑크색 옷들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무지개 반짝이 블링블링 구두를 사는 것에서 나는 두 손 두발 다 들었다 생각했다. (그 구두 가게에 즐비한 반짝이 구두 중에서 가장 화려한 것을 집어 드는 아이를 보며 얼마나 헛웃음을 터트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또 하나의 거대한 산이 남았으니, 그것을 바로 캐릭터 의류.... 핑크색 옷이라면 이제 나도 많이 적응을 하였기에 내가 먼저 사다 주는 면역력까지 갖추게 되었는데,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옷은 좀처럼 마음이 가질 않아 그것을 돈을 주고 사야 한다는 것이 영 내키지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캐릭터 의류는 왜 유독 촌스러운 핑크와 싼 티 나는 레이스를 쓰는 건지... 옷은 엉망인데 캐릭터가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가격은 대부분 비싼 편에 속했다. 누가 봐도 장삿속이 훤한데, 아이는 캐릭터 의류만 보면 눈이 돌아간다. 


아이에게 예쁜 원피스를 하나 사주겠노라며 마음먹고 찾아간 쇼핑몰. 그렇게 마음을 먹고 갔음에도 나는 끝내 캐릭터 원피스를 집어 들지 못했다. 아이에게 다른 예쁜 원피스들을 이것저것 제안해보았지만 아이는 끝까지 촌스러운 캐릭터 원피스를 고집했고, 나는 결국 빈손으로 쇼핑몰을 나서게 됐다. 그 돈 주고 그 원피스를 사입히고 싶지는 않은 것. 그것은 엄마의 욕심일 테다. 아이를 내가 보기에 예쁜 것으로 입혀주려고 하는 것. 결국 내 취향을 아이에게 강요하는 꼴인 셈이다.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은 결국 아이를 잘 독립시키는 데에 있다고 믿는 나였는데, 이깟 원피스를 하나 고르는데도 나는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옆집 아이였으면 그냥 좋아하는 거 사주라고 쿨하게 이야기했을 텐데, 엄마라서 나는 쿨하지 못했다. 그렇게 엄마는 사주지 못한 캐릭터 원피스를 사준건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쿨했고, 기꺼이 아이가 좋아할 캐릭터가 그려진 원피스에 돈을 지불했다. 아이는 당연히 행복했고, 그 원피스를 빨기 무섭게 입고 또 입었다. 


나는 엄마라서 하지 못한 것들을 이모는 했고, 할머니도 했다. 나는 엄마라서 아이의 요구를 보다 쉽게 들어주었고, 나는 엄마라서 아이의 요구를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다. 엄마이기 때문에 내 아이들을 가장 잘 알고 잘 대할 것 같지만, 엄마이기 때문에 남보다 더 못하고 실패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니 엄마라고 내가 내 아이를 제일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엄마라고 내 아이를 제일 잘 대해주는 것도 아니다. 결국 겸손해야 하는 것. 그것이 엄마라는 이름 아닐까. 내 아이들이지만 내 뜻대로 하려 해선 안되고, 내 뜻대로 되지도 않는다는 것. 나는 그것을 또 한 번 배운다. 그리고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해주는 동생과 엄마가 곁에 있어 얼마나 감사하고 든든한지 모른다. 그들 덕분에 배웠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꼭 글로 남겨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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