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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새미 Jul 11. 2020

화내도 괜찮아

앵거가 새드니스를 만났을 때

천성이다.

나는 본래 타고나기를 화가 많은 사람인거다.

이것을 알아채고 인정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수년 전 애니메이션 '인사이드아웃'을 영화관에서 보고 나와 남자친구와 “나의 주감정은 누구일까?”를 두고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 때 처음 나의 주감정에 대해 생각해보았는데, ('조이'이기를 내심 바랐던 것 같지만) 나는 '앵거'라는 걸 그 때 깨달았다. 내가 '앵거'라니... '앵거'라니... 그러고 보니 엄마에게 자주 들었던 말들이 있다. "새미야 화내지말고~" "새미야 짜증내지말고~" 대부분의 관계 안에서 나는 그 '화'를 잘 숨기고 살았지만 가족들에게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밖에서는 '나이스'한 사람이었겠지만, 가족들에게는 '힘든' 사람이었을게다. 처음에는 그냥 '사춘기여서그래' (오춘기 육춘기 계속 온다는게 문제지만) '내가 지금 상황이 힘들어서그래' 하면서 나의 '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화'가 많은 사람은 사랑받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참으면 참을수록 화는 더 크게 터질 뿐이었고, 크게 터질수록 나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검색창에 '화'를 검색해보니, '몹시 못마땅하거나 언짢아서 나는 성'이라고 나온다. 한자로 불 화(火)자를 쓴다는 걸 그제서 알았다. 그래서 '불같다'도 검색해 보았다. “1. 정열이나 신념, 감정 따위가 뜨겁고 강렬하다. 2. 성격이 매우 급하고 강렬하다. 3. 다그치는 기세가 드세거나 무섭다.” 뜨겁고 급하고 강렬하고 드센데다 무서운 사람이다. 누가 좋아하겠는가. 나라도 싫다. 그래서 늘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기를 바라며 아니려고 노력해 왔었다. 세상 속에서는 '조이'가 되어야 사랑받기가 더 쉬웠다. 나는 ‘앵거’이지만 사랑받기 위해 ‘앵거’가 아닌 척 했다. 하지만 미처 아닌척하지 못한 ‘화’는 대부분 엄마에게로 향했고, 엄마는 상처받고 괴로워했다. 엄마는 그 '화'를 누그러트리라고 늘 이야기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 슬프고 외로웠다. 게다가 더 화가 날 뿐이었다. 급기야 내가 마땅히 화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도 부모님은 내가 참기를 바랐다. 결국 나도 상처받고 괴로워했다. 이젠 어떤 모습이 나인지 헛갈리기 시작했고 그래서 나조차 내가 ‘앵거’를 주감정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화를 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 때 '인사이드 아웃'을 같이 본 남자친구였다. 남자친구와의 대화 중 내가 엄마에게 화를 내지 말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하자, 본디 화가 많은 사람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하면 안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화를 내도 괜찮다는 것이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략 그런 내용 이었다.) 너무 충격이었다. 살면서 화를 내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심지어 내가 한바탕 무언가 때문에 ‘화’를 잔뜩 표출하고 나서였는데도 그는 그 말을 나에게 해준 것이다. 정말 화를 내도 된다고? 내가 화를 내도 나를 사랑해 줄 거라는 얘긴가? 왜? 무엇 때문에? 나를 품어서 낳아 기른 우리 엄마도 힘들어하는 나의 천성인데, 만난지 고작 1년 반도 안 된 네가 그걸 받아주겠다고?


화를 내도 괜찮다는 말은 마치 내가 내 모습 그대로의 나여도 괜찮다고 말하는 듯 들렸다. 늘 부정당해 왔던, 혹은 억눌려왔던 그래서 나조차 사랑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이 사람은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말의 힘은 강력했다. 그 말에 나는 나를 온전히 인정하는데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앵거’여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해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를 인정하고 나니 스스로를 더 사랑할 수도 있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내 마음 속의 방. 어둡고 침침하던 그 곳. 매캐한 냄새에 이것저것 어질러져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던 그 곳의 문을 활짝 연 듯 했다. 햇볕이 들어오도록 창문을 열고 먼지를 털어내어 불필요 한 것들을 버리고 정리를 시작한 기분이 들었다. 나의 무수한 장점들을 인정해주는 것보다 내 하나의 단점을 인정해주는 그 말이 이렇게나 강력하다는 것을 그 때 깨달았다.


화를 내기 시작하면 내 화를 정당화 시키기 위해 온갖 이유들을 끌어 모아 더 큰 화를 만들어 냈었다. 다들 화내면 안된다고 하니까, 화를 낼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그냥 작은 화였는데, 이유들을 붙이다보니 나조차도 감당이 안 되는 커다란 화가 되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살들이 붙어 커질 대로 커진 화는 날카로운 말이 되고, 그 말은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그 상처는 고스라니 나에게 죄책감으로 되어 돌아왔다. 나는 또 못난 사람이 되고 내 안의 화를 나는 다스리지 못하게 됐다. 화를 건강하게 표출하는 것, 나는 아직도 그 방법을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화를 내도 괜찮다고 인정받고 나니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이 작아졌다. 하지 말라면 더하고 싶은 꼬인 마음이 풀어진 것이다. 막상 해도 된다고 하니 하고 싶다는 마음이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화를 내지 않게 되지는 않았지만, 화를 내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그 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괜한 살들을 붙여 키우는 어리석은 짓을 줄여가게 했다.


그 때 그 대화는 남자친구와 결혼 준비 중에 나눈 대화였지만, 아마도 그 말에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 사람과 남은 생을 같이 살아도 괜찮겠다고 안심했던 것 같다. 그 남자친구는 지금의 남편이 되었고, 그와 산지 3년이 조금 넘었다. 돌아보니 우리는 서로의 ‘다름’으로 인해 무수히 많이 부딪혔고 그는 나의 ‘화’를 겪을 일이 상당히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나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해주었다. 심하게 화를 낸 뒤에 죄책감이 몰려오면 늘 물어봤었다. 내가 이렇게 화를 내는대도 나를 사랑하느냐고. 그럼 그는 언제나 그렇다고 했다. 화를 내도 괜찮다는 그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던 거다. 이 사람은 정말 그 말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무엇 때문에 그가 그렇게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냥 가끔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잘난 점이 아닌 못난 점을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은 왠지 모를 ‘든든함’이다. 어디 가서도 주눅 들지 않을 수 있는 ‘자존감‘이 거기서부터 배어나온다. 누가 뭐래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는 ’당당함’이 장착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고마움’이다. 어쩔 땐 신기하고, 어쩔 땐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이 내 남편이라는 것이 새삼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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