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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새미 Nov 06. 2023

주간 새미일기

2023.10.30(월)~2023.11.05(일)

2023.10.30 (월)

엄마가 예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엄마 입을 통해 들었지만 그것은 외할머니가 하신 말씀이었다. 밥 대신 먹는 알약이 나오면 좋겠다고. 밥을 안 먹고 그 알약을 밥대신 먹으면 되는 그런 세상을 할머니는 꿈꾸셨던 것이다. 결혼 전에는 그 말이 어떤 마음에서 나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좀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나도 그런 알약이 제발 좀 개발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니까... 그만큼 밥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고된 노동이었다. 뭐 먹지... 그 질문 만으로도 괴로운데, 겨우겨우 메뉴를 정하고도 요리해서 차리고, 먹고, 치우는 일이 남아있으니 환장할 노릇이다. 그렇게 하루에 3번을 식사를 한다니... '먹고' 살기란 참 쉬운 일이 아니다. 요리에 취미가 없는 나는 그 알약만을 기다리지만 아무래도 요식업계의 큰손들에 의해서 그 알약 개발은 진척되기 어려울 성 싶다.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는 요리를 정말 잘하시는 분이었다. 반찬가게를 하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손맛이 좋으신 데다, 식재료를 그때그때마다 사서 요리를 하시는 터라 늘 냉장고는 텅텅 비어 있었지만 할머니가 한 요리들만큼은 늘 신선하고 깔끔했다. 냉장고는 늘 비어있는데, 하루 세끼 밥 국 반찬들을 차리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밥 차리는데 할애해야 하는 걸까. 거의 뭐, 하루 종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기억에 할머니는 그래서 늘 부엌에 계셨다. 그런 할머니에 비하면 나는 거의 요리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야 맞다. 배달앱 VIP에다 어떻게 하면 요리를 하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을까 궁리하며 반조리 식품을 이것저것 사보는 나다. 그런 나도 그 알약 개발을 기다리는데, 할머니는 오죽하셨을까... 그런데 오늘은 큰맘 먹고 남편에게 요리를 해주기로 한다. 어제 남편 생일이었는데, 내가 감기로 골골거리느라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던 터라 오늘 저녁엔 뭘 좀 해줘야지 싶었다. 아직 감기기운이 남아있어 골골거리긴 마찬가지였지만 어제보단 한결 나아서 두부김치와 계란말이를 했다. 대단한 요리도 아니고 흔하디 흔한 반찬 두 가지지만 남편은 무척이나 행복해했다. 나에게 고맙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지 모른다. 너무 별것 아닌 식사에 고마워해주니 약간 머쓱할 지경이었다. 그래, 할머니도 밥 대신 먹는 알약을 기다릴 만큼 밥 하는 게 고된 일이었겠지만 이렇게 맛있게 먹어주는 식구들이 있으니 그 일들을 매일매일 해내셨던 거겠지. 나도 알약을 간절히 기다리지만, 그래도 행복해하는 남편을 보니 밥 하는 일이 보람되긴 하다. 그런데 갑자기 외할머니 밥이 먹고 싶다. 아줌마가 되니 남이 해준 밥이 젤로 맛난데, 외할머니가 해준 밥이라면 말해 무엇하랴... 할머니의 깻잎장아찌레시피를 배워뒀어야 했는데... 물에 만 밥에 깻잎장아찌 딱 얹어서 한입... 하... 너무 맛있겠다. 할머니! 천국에서는 밥 안 하죠? 남이 해준 밥 드세요... 남이 해준 밥... 근데 난 할머니 밥이 먹고 싶네요... 헤헤


2023.10.31(화)

입이 심심해 껌을 씹었다. 그런데 껌 포장지에 이상한 말이 쓰여있다. "사랑의 한숨".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껌 포장지마다 꽃말들이 소개되어 있는 것이었다. '사랑의 한숨'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칡'이었다. 처음에는 '사랑의 한숨이 뭐람? 한숨은 왠지 부정적이라 사랑이랑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은데...' 했다가, 잠깐동안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래... 맞아 그런 건가보다' 싶은 마음이 든다. 사랑한다고 해서 늘 좋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걸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괜한 호기심이 들어 칡에 대해서 좀 더 찾아보았는데, 칡이 한자로 '갈(葛)'이란다. 이 한자어는 '갈등(葛藤)'이라는 단어에서 쓰인다. 이쯤 되니 제주의 어느 곶자왈에서 숲해설을 들을 때 들었던 내용이 생각난다. 갈등이라는 단어는 칡 갈(葛)과 등나무 등(藤)이 합쳐진 단어인데, 이 칡과 등나무는 둘 다 덩굴식물이라 나무를 감고 올라가면서 자라는데, 문제는 서로 감아 올라가는 방향이 달라 서로 부딪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갈등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갈등이라는 단어에서 쓰이는 칡이라니, 꽃말인 '사랑의 한숨'이 조금 더 이해가 된다. 많은 인간관계들이 그런 것 같다. 깊이 있는 관계를 맺어갈수록 (그래서 가족관계는 더더욱) 우리는 수많은 갈등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그 과정안에서 종종 한숨을 쉬게 되는 것일 테다. 그래도 위로가 되는 점은 그 한숨이 그냥 한숨이 아니라 '사랑의 한숨'이라는 것이다. 더 깊은 관계를 맺으려다 보니 갈등이 생기고 한숨이 나오는 일들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의 한숨'이라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그냥 한숨이 아니라 '사랑의 한숨'. 아침에도 첫째가 바닥에 잼을 흘렸는데, 둘째가 내 옷을 질질 끌고 다니다가 그 잼을 옷으로 훑고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한숨부터 나왔지만 그것이 오롯이 둘째의 잘못이 될까 봐 잼은 자기가 흘렸다며 사과하는 첫째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한숨은 나오지만 나는 여전히 아이들을 사랑한다. 그런 게 칡의 꽃말이 말하는 '사랑의 한숨'이 아닐까. 아이들도 언젠간 이해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사랑의 한숨'을. 껌종이 하나에 하루종일 많은 생각을 했다.


2023.11.01 (수)

남편이 갑작스러운 1박 2일 출장을 갔다. 저녁시간이 빡쎌 것을 생각해 낮에는 최대한 집안일을 하지 않기로 했다. 오전에 필라테스를 다녀오고는 오후에는 침대에 누워 계속 책을 읽었다.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매일 이렇게 누워 책을 읽는 게 일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낮시간에 충전을 하고 나니, 저녁에 아이들과 놀아줄 힘이 생겼다. 저녁식사를 하고 가을이가 나에게 설거지를 할 거냐고 묻는다. 그러려고 했는데 왜 묻냐고 했더니 엄마랑 놀고 싶단다. 그래 까짓것 놀고 하지 뭐 싶어 아이들과 먼저 놀기로 했다.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를 시작으로 숨바꼭질, 축구, 배드민턴, 볼링 등등 다양한 놀이들을 했다. 신나게 뛰어 논 뒤 아이들 둘 목욕까지 시켜놓은 뒤, 친정엄마가 오셨다. 안 오셔도 된다고 했는데, 아이들 보고 싶다며 오셨다. 그래도 친정엄마가 와주셔서 뒤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아까 아이들 저녁만 먹였지, 그때까지 내 저녁식사는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건 낮에 충분히 내 시간을 가진 덕이었던 것 같다. 육아에 있어서 내 시간을 갖는 건 이렇게나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2023.11.02 (목)

11월이 되었지만 오늘따라 날이 푹했다. 그래서 오늘은 하원 후에 아이들과 공원이나 놀이터에 나가 놀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금세 저녁시간이 될 것을 생각해 요기를 할 요량으로 고구마랑 사과, 귤 등을 챙겨서 작정하고 나갔다. 아이들은 신이 났다. 낙엽이 잔뜩 쌓인 길 위를 킥보드를 타고 달리는데 그 바스락 거리는 소리마저 경쾌하다. 가을이는 킥보드를 타다 말고 멈춰 서서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가을이랑 봄이랑 겨울이랑 여름이랑 다 좋아! “라고 한다.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했다가, 그냥 이 모든 것이 다 너무 좋다는 뜻이겠거니 생각한다. 우리는 가을이가 좋아하는 놀이터로 갔다. 신이 난 가을이는 건널목 앞에서 기다리면서 여름이 킥보드에 쌓인 낙엽도 털어주고, 놀이터에 도착해서는 여름이가 멀리 세워둔 킥보드도 가져다 옮겨주었다. 밖에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일찍 지는 것이 아쉬웠다. 또래 친구들이 모두 떠난 놀이터에서 끝까지 놀다가 나온 뒤에도, 다른 공원에 있는 놀이터에서 또 한참을 놀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몸은 고단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뿌듯했다.


2023.11.03 (금)

아이들이 등원할 때, 나는 종종 그때 사진을 찍는다. 등원을 하기까지 준비 과정은 험난하지만, (물론 등원하는 길도 험난할 때가 있기 마련이지만) 잠시후면 아이들을 보내고 나 혼자가 되기 때문일까 등원하는 길 위에서는 기분이 좋아 아이들 사진을 찍을 때가 많다. 그럼 두 아이는 확실히 카메라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연령대도 다르고, (첫째 만 5세, 둘째 만 2세) 성격이나 성별이 다른 것도 원인일 테다. 첫째는 대부분 카메라를 응시한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눈웃음을 장착하고 다양한 포즈를 선보인다. 킥보드를 타고 가다가도 카메라를 들면 얼른 멈춰 서서 포즈를 취하고, 심지어 내가 뒤에서 카메라를 들어도 뒤돌아 바로 포즈를 취해준다. 가끔은 그녀의 능력에 찍는 나조차도 놀랄 때가 많다. 얼마 전 유치원에서 수료사진 촬영을 위해 작가님이 오셨는데, 가을이가 사진 찍을 때 포즈도 잘 취하고 표정도 좋다고 칭찬을 받았단다. 이렇듯 그녀는 대부분 타고난 모델의 면모를 보인다. 둘째는 다르다. 그는 대부분 카메라를 응시하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이름을 부르고 카메라를 봐달라고 애걸해도 웬만해서는 카메라를 봐주지 않는다. 그냥 봐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거의 사진을 찍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가 카메라를 보고, 포즈를 취해줄 때는 누나를 따라 하고 싶을 때뿐이다. 그래서 둘째는 대부분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찍힌다. 일부러 포즈를 취하지도 표정을 만들지도 않기 때문에 그 순간의 모습 그대로 사진에 담긴다. 그런 두 아이들을 찍은 사진을 보는데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 사진 한 장 찍는데도 이렇게나 다르다니. 둘이 달라서 참 재밌다. 내가 아이가 둘 있는데 남매라고 하면 어르신들이 많이들 그런다.  아들 딸이 달라서 키우는 재미가 있겠다고. 이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좀 알 것 같다. 


2023.11.04 (토)

김포에 있는 캠핑장을 갔다. 자연 속이라기보다는 인조잔디가 깔끔하게 깔려있고 텐트며 캠핑용품들이 구비가 되어있는 그런 캠핑장이었다. 그리고 그 캠핑장에는 초대형 에어바운스가 있었다. 아이들이 모이는 행사에서는 어김없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 에어바운스다. 그런데 이 에어바운스는 야외에 있기도 했고,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큰 에어바운스였다. 그래서 그런가 아이들은 무척 신이 났다. 11월인데도 날이 더웠다. 야외 캠핑장이라 혹여나 감기라도 걸릴까 봐 도톰한 긴팔긴바지를 입혀온 덕분에 아이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놀았다. 밥도 금방 먹고 또 에어바운스로 달려가고, 잠깐 간식을 먹으며 쉬는가 싶더니 이내 또 에어바운스로 달려간다. 우리는 그 캠핑장에서 둘째 어린이집 친구까지 만났다. 그 캠핑장이 아이들 있는 집에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지 알 것 같았다. 저녁 8시, 에어바운스 운영이 끝날 때까지 아이들은 하루종일 에어바운스에서 놀았다. 그런데 집에 오는 길에도, 자기 전에도 에어바운스 재밌었다는 얘기를 하더니,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그 에어바운스 또 하러 가고 싶다는 아이들이다. 이쯤 되니 진짜 그 캠핑장을 또 예약해서 가던지, 아니면 집에 에어바운스를 며칠 대여를 해야 되는지 고민이 될 지경이다. 


2023.11.05 (일)

우리 교회에는 따로 아이들과 예배를 드릴 공간이 없어 다 같이 한 공간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들이 자연스럽게 예배 중에도 계속 함께하게 되는데, 오늘은 김여름이 무척 거슬렸다. 내 뒤에 할머니와 앉아 있던 여름이는 설교시간 내내 계속 뭐라 뭐라 떠들고 노래를 부르고 난리였다. 그것도 어찌나 크게 말을 하던지 (노래를 부르던지) 내가 지금 목사님이 하시는 설교를 듣고 있는 건지, 김여름이 하는 설교를 듣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였다. 몇 번이나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줘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목사님께도 다른 성도들 한테도 미안할 지경이었지만, 아이는 노래도 말도 멈출 생각이 없다. 그렇게 설교시간 내내 떠들더니 설교가 끝나니까 조용하다. (어이구...) 기도도 끝나고, 마지막으로 다 같이 서서 찬양을 부르는 시간. 갑자기 여름이도 의자 위에 벌떡 일어서더니 그 찬양을 함께 부르기 시작한다. 마지막 찬양은 매주 같은 곡을 부르기 때문에 아이도 그 찬양이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었나 보다. 가사도 끝단어 몇 글자 겨우 맞추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음은 제법 정확하게 집는다. 그 모습에 목사님이 찬양을 부르다 울컥하셨고, 그런 목사님을 보는 나도 순간 울컥했다. 왜 목사님이 울컥하셨는지 나는 또 왜 울컥했는지 설명하라면 못하겠지만, 설교시간에 그렇게 떠들고 뛰어다니고 장난치는 말썽꾸러기가 어느새 이 교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어 함께 찬양을 끝까지 완창 하는 모습은 제법 기특했다. 아이는 그 찬양의 의미도 뜻도 모르고 불렀겠지만, 아이의 입을 통해 나오는 찬양을 듣는 우리에게는 그 모습이 은혜였다. 어린아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나저나 예수님이 설교하실 때도 아이들이 떠들고 뛰어다녔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까...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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