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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수 Jun 01. 2019

반지하를 넘어서

영화 <기생충>

※영화의 주요 장면들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봉준호 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작품들. 일반 대중들은 역시 <살인의 추억>과 <괴물>, <설국열차>를 꼽을 것이고 시네필들은 <마더>와 <플란다스의 개>를 이야기할 것이다. 해외에서는 아무래도 넷플릭스를 통해 스트리밍 되었던 <옥자>가 가장 유명할 것이다.

 봉준호의 영화 속 세계는 언제나 사회의 소수자들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는 그중에서도 <괴물>, <설국열차>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생기는 위계질서와 계급론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영화 또한 그 이야기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겠지만, 영화의 구조에서 큰 차이점을 가진다. <설국열차>가 방법론적인 이야기를 했다면, <기생충>은 지금 시대의 상황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영화이다.



 <설국열차>의 계급론은 수평적인 구조였다. 선(노동자들)과 악(부르주아, 자본가들)이 명확했고, 수평적으로 이어진 기차 칸을 한 칸씩 나아가며 자본가들에 맞서고자 하는 혁명의 이데올로기였다. 하지만 <기생충>의 계급론은 결이 다르다. <기생충>은 층위적인 구조의 영화이다.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가 계속해서 관객들에게 주입되고, 극의 주요한 장치로서 활용된다. 선과 악이 명확하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의 혜택을 받고 있는 박사장(이선균 분)네 가족들은 무지하고 멍청할지언정 본성이 악한 사람으로는 묘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회의 하류 계층을 대변하는 기택(송강호 분)과 그의 가족들이 악하게 묘사되는가? 그들은 남들을 속이고 이용해서 본인들의 사익을 챙기지만 그것은 이 처절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에 가깝다. 자신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게 된 운전기사를 걱정하는 기택의 모습은, 그들의 내면이 악한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박사장 네 가족에 기생하는 '기생충'이다.



영화의 시작은 기우(최우식 분)가 부유한 친구인 민혁(박서준 분)의 소개로 다혜(정지소 분)의 과외를 맡게 되면서이다.  민혁은 기우에게 자신의 할아버지가 집에 수석이 남아서 전해주라 했다며 기우에게 재물복을 불러들인다는 수석을 건네준다. 자본 그 자체를 상징하는 그 수석에 기우는 영화 내내 집착을 놓지 못한다. 하지만 결국 기우는 수석에 의해 피를 흘리게 되고,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수석을 '본래 있던 자리'인 자연으로 되돌려놓게 된다.


 기택의 가족이 박사장 네 집에 기생하게 되는 계기는 기우의 과외이다. 과외 -선생의 학력에 따라 임금의 수준이 정해진다는 점에서, 결국 과외의 목적은 성적을 올리고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학벌 그 자체를 상징한다. 대한민국에서 학벌, 즉 좋은 대학이란 신분 상승의, 계단을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렇기에 박사장 네 가족이 되고 싶었던, 그 집에 살고 싶었던 기택의 가족 또한 과외라는 수단을 통해 그들에게 가까워지고자 한다.



 기택의 집은 반지하이다. 지상의 빛이 반쪽짜리 창문으로 세어 들어오고, 그 빛을 보며 위로 올라갈, 지상의 집으로 올라갈 희망을 꿈꾼다. 사회와의 유일한 소통창구인 와이파이마저도 다른 집에 기생하던 그들은, 우연찮은 기회로 지상의 집에, 더 높은 층위의 계급에 다다를 동아줄을 잡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은 본인들과 같은 계층의 사람들-운전기사, 가정부, 가정부의 숨겨진 남편-을 내치게 된다. 박사장과 비슷한 계급으로 보였던 전 가정부(이정은 분)는, 사실은 기택네와 별반 다르지 않은 같은 계층의 소시민이었다. 사채로 고통받는 그의 남편은 한없이 깊은 계단을 내려가서 있는 지하실에서 맹목적으로 박사장(기득권)을 숭배하고만 있다.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혈투. 그 속에서 범해지는 살인. 기택의 가족은 거실의 탁자 밑에 숨고, 박사장과 그의 아내는 바로 위 소파에서 섹스를 한다. 생명의 근간이 되는 섹스는 위에서 행해지고, 생명을 앗아가는 살인은 아래에서 행해진다.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처절했던 하룻밤의 사건들이 끝나고, 그들은 다시 계단을 내려와 한없이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박사장 집 앞의 내리막길. 도로변의 계단. 강 옆의 내리막길. 달동네의 계단. 기택의 반지하 집. 끝없이 계속되는 하강의 메타포.

 비는 하늘에서 땅으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계단 위의 박사장 네 가족은 세상모르고 깊은 숙면을 취하고 있는 동안, 기택의 가족은 빗물로 인해 침수된 집에서 고통받고 체육관 마룻바닥에서 쪽잠을 청한다. 물에 잠긴 기택의 집에서 그들의 유일한 도피처는 와이파이가 잡히는 그 장소, 집 안에서 가장 불결한 장소인 화장실의 변기 위이다.



 언급했듯이 박사장과 그의 가족은 이 영화에서 뚜렷한 악인이라고 칭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무례함이 있고, 자본의 권력에서 비롯되는 악덕함이 있다. 반지하의 냄새, 서민의 냄새를 혐오하고, 인디언 상황극을 꺼려하는 기택에게 "지금 급료 받고 있으시잖아요"라며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폭우 한 번에 삶의 터전이 없어진 기택의 앞에서,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호화롭게 파티를 여는 박사장의 태평함. 자신들은 서로 죽을 듯이 싸우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데, 우스꽝스럽게 인디언 흉내를 내고 있는 상황 자체의 부조리함. 결국 이 모든 구조에서 피해 보는 사람들은 자신들뿐이라는 깨달음. 지하철도 타지 않아 본 그들의 무지함에서 나오는 불쾌함, 갑을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강제성. 씻어버리고 싶은, 그러나 씻어낼 수 없는 우리들의 냄새. 이 모든 복합적인 감정의 결과로써 기택은 살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살인은 비록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그 어떤 행동보다도 설득력있게 그려진다.



 기택은 살인으로써 이 사회구조에 반항하고자 했으나, 결국 그는 다시 박사장의 저택으로 들어가 계단을 내려간다. 기우는 기택을 지하에서 꺼내 주기 위해, 언덕 위의 그 저택에서 살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벌리라 다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꿈만 같은 상상에 불과하다. 현실의 기우는, 그리고 우리들은 여전히 반지하 방의 변기 뚜껑 위에서 담배를 태우고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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