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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수 May 22. 2019

마녀의 성

<서스페리아>(2018,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

*영화의 주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리오 아르젠토의 역작이자 지알로의 황금기를 대변했던 <서스페리아>(1977)은 자극적인 살인 장면과 수려한 미장센으로 이루어진, 그러나 이야기 자체의 깊이감은 찾아볼 수 없는 이상한 물건이었다. 물론 이는 지알로의 특징이기도 하다. 지금 와서는 내러티브도 빈약하며 여성 혐오적이고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지알로라는 장르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루카 구아다니노는 어떤 방식으로 재해석했을까. 사실 이번 <서스페리아>(2018)은 재해석보다도 원작의 기본 골조만 가져와 정치적인 영화로 재창조한 물건에 가깝다. 이 영화는 세대적인 죄의식에 관한 지독하고도 잔혹한 우화이다.


 영화는 크게 두 가지의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 커다란 줄기의 이야기만 놓고 이야기하자면 마녀들이 지배하는 무용학교에 전학 온 수지(다코타 존슨)가 마녀들에게 현혹되어 가며 학교의 미스터리가 서서히 밝혀지는 초자연적인 오컬트 영화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영화의 자극적인 이미지들과 수많은 메타포, 계속해서 보여지는 당시 사회상들이 결합되지 않는다. 결국 이 영화를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 시대와 결부시켜 이해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1977년의 독일은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태어난 세대인 바더 마인호프를 위시로 한 RAF(적군파)는 기성세대, 즉 자신의 부모들이 나치 시절의 만행과 범죄들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에 분개했다. 지금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서구 열강들의 이권 싸움을 위한 전쟁, 학살에 대해 분노했다. 미국을 대표로 한 서구권 강대국들을 상징하는 자유주의, 자본주의 자체에 환멸을 느꼈다. 그 결과 그들은 비행기를 납치하고, 자본가와 유력 정치가들을 암살했으며, 은행과 공공기관에 테러를 자행했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학생들은 당시의 젊은 세대들을 상징한다. 그들 중에는 적군파도 있고,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 또한 있다. 영화에서 행해지는 기묘하면서도 고통스러워 보이는 폴크라는 춤은, 1970년대 독일에서 젊은이들이 겪고 있던 억압, 더 나아가서 나치가 행하던 홀로코스트 또는 온갖 악행들 그 자체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학원의 교사(마녀)들, 그중에서도 마녀들의 대장처럼 보이는 마르코스는 나치 독일 시절 그들에게 가담했고, 지금도 그들을 숭배하며 권력을 유지해오고 있는 기득권 그 자체이다. 그들이 학생들에게 가르쳐주는 춤부터 시작해서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행하는 고문과 감금, 학대는 그 피로 얼룩진 역사의 산물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물론 나치 독일 시대에 살았던 기성세대라고 해서 모두 그들에 동조한 가해자였던 것은 아니다. 나치의 만행으로 인해 잃은 아내를 베를린 장벽으로 갈라진 동독과 서독을 오가며 그리워하는 클렘페러 박사는 그 시절을 살아오며 상처를 받고, 그런 과거에서 지금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평범한 피해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혹독하면서도 본인만의 철학을 가지고 춤을 교육시키는, 마녀들의 사상에 가담하는 것처럼 보였던 마담 블랑은 사실 마르코스의 대척점에서 마녀들의 폭력적이고 잔혹한 행동들을 막으려 하는 인물이었다. 이런 점에서 마담 블랑은 한 때 그들(나치)에 가담했으나 그에 죄의식을 느끼고 속죄하고자 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기묘하게도(당연히 의도적으로) 앞에서 언급한 세 인물은 모두 틸다 스윈턴이 연기했다. 영화의 종반부에 이르러서, 수지가 사실 마녀 서스파리움 그 자체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는 이 세 명의 틸다 스윈턴: 나치에 동조했고 지금도 그들을 숭배하는 기성세대들, 한때 나치에 동조했으나 그에 죄의식을 느끼고 반성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상처 받고 살아온 사람들- 이 모두를 한 자리에 모아서 아름답고도 잔혹하고 기괴한 '처형식'을 벌인다. 마녀들 간의 권력 싸움 속에서 학생들은 고문당하고, 죽임 당하며 괴로워했을 뿐이다. 그들을 구원해줄 서스파리움이 무엇을 원하냐고 묻자, 그들은 "그냥 죽여주세요"라며 부탁한다. 학생들을 구원하고 마녀들을 처단하는 서스파리움의 모습과 그 일련의 시퀀스들은 잔혹하지만 또 한없이 서글프다.

 서스파리움은 클렘페러 박사에게는 다가가지 않고 그저 모든 상황들을 지켜보게 할 뿐이다. 모든 것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쉬고 있는 박사에게 서스파리움이 다시 찾아와 부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고 "당신은 모든 것을 잊을 자격이 있다"며 그의 기억을 지워준다. 그리고 카메라의 시선은 서독의 베를린을 지나, 동독의 베를린에 있는 클렘페러 박사와 부인의 집, 벽에 그려져 있는 낙서-추억을 줌 인 시키며 영화를 끝맺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난 후, 서스파리움은 카메라에 손을 뻗는다. 마치 영화를, 그 시대를 지켜보던 관객들의 기억 또한 지워주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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