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엑시트>
<엑시트>는 이전부터 시나리오가 좋다며 암암리에 이야기가 돌았던 영화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올해 초, 같은 이야기가 돌았던 <뺑반>의 처참한 완성도를 보고 이런 낭설에 대한 신뢰도를 잃기도 했었고, 무엇보다 공개되는 포스터와 예고편 또한 너무나도 전형적인 클리셰 범벅의 한국영화 느낌이었기에 생리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주연이 코미디 연기 전문의 조정석과 아이돌 출신 배우 임윤아라니(잠시 변명하자면, 본인은 소녀시대의 윤아를 매우 매우 매우 좋아한다. 다만 연기자로서는 별개일 뿐)... 기존의 충무로 영화에 염증을 느끼던 관객이라면, 거를 타선이 한두 가지가 아닌 영화였다. 때문에 본인도 <엑시트>는 절대 볼 일 없을 영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개봉 전 시사회부터 시작해서 개봉 후 주변 사람들, 그리고 인터넷에서의 평들이 너무나도 호평일색이었다. 기존의 한국영화들과는 다르다고 했다. 심지어 이런 한국 상업영화와는 담을 쌓고 지내던 분들마저 추천해주셨다. 올해 초 같은 평을 믿고 <극한직업>을 보았다가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지만, 그래도 마지막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 영화, 간단히 말해서 정말 영리하다. 보통 이런 재난물에서 등장하는 곁다리의 이야기들은 전부 쳐내고, 관객들에게 딱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한다. 한국 재난물에 열이면 열 등장하는 정부(청와대)와 그 외 답답한 공무원들의 온갖 '뻘짓'또한 등장하지 않는다. 재난의 원인 또한 아주 간략하게 잠깐 보여주고 끝낸다. 그 대신 주인공 가족들의 이야기에 시간을 들여서 차근차근히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아주 깔끔하게 잘 짜여 있는 영화이다.
취업준비생, 직장 내에서 갑질에 시달리는 이 두 주인공은 대한민국 현시대의 청년들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초반 시퀀스에서 용남이 겪는 모든 일들과 듣게 되는 이야기들은, 대한민국에서 취업준비를 해본 청년들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현실감이 넘치는 대사와 상황들의 연속이다. 의주가 겪게 되는 성희롱과 직장 상사의 괴롭힘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런 이들에게 갑작스럽게 닥치는 재난. 사실 이들에게는 비단 유독가스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현실, 인생 그 자체가 재난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재난 속에서 가족/고객들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들의 모습은 하루하루를 악착같이 버텨내며 살아가는 지금의 청년 세대의 표상인 것이다.
영화는 계속해서 현시대 대한민국의 사회상과 작중에서의 재난상황을 동치 시켜서 보여준다. 학원에 갇혀있는 아이들은 불과 몇 년 전의 끔찍한 사고를 떠올리게 하고, '다음번에는 높은 층에 있는 회사에 원서를 넣을 것'이라며 높은 빌딩을 올려다보며 다짐하는 용남의 대사에는 자본과 계급에 대한 은유도 엿보인다. 유독가스는 낮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오기 때문에, 주인공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꽤나 노골적인 상승과 하강의 메타포가 계속해서 보여진다. 올 상반기 최대의 화제작이었던 봉준호의 <기생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단순하면서도 교조적인 면이 엿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엑시트>는 <기생충>보다 훨씬 세련된 방식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낸다.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또 있다. <엑시트>는 재난물이라는 장르의 공식을 그대로 따랐을 것 같지만, 꽤 여러 부분에서 클리셰를 영리하게 비튼다. 가장 중요한 지점은 이 영화는 재난상황과 사람들의 인명피해를 전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시민들의 모습은 최소한으로 짧게 보여주고, 두 주인공이 고층 건물에서 바라보며 재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고통의 전시가 없다는 점에서 윤리/도덕적으로도 현명했고, 모든 관객들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상업적으로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또한 보통의 재난물에서 주인공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희생정신은 이 영화에서도 보여지지만, 작중의 인물들은 본인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의젓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자기도 살고 싶다며 슬프게 흐느낄 뿐이다. 훨씬 현실적이면서도 인간적이게 느껴지고 관객이 이입하기 쉬워진다. 이런 재난 영화에서 이레 등장하는 멍청한 공무원들은 찾아볼 수 없다.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러브라인 또한 없다. 대신에 온갖 한국적인 장치들을 적절하게 활용한다. 칠순잔치, 휘황찬란한 간판들, 고깃집, 방탈출 카페, 인터넷 방송, 드론, 해병대 전우회까지. 물론 이 요소들을 플롯에 결부시키는 과정 속 특정 지점들에서 어색함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냈고 그 결과 여타 다른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보적인 현실성과 자연스러운 몰입감을 얻어낼 수 있었다.
보는 내내 감탄을 금치 못했지만, 영화는 마지막까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그 흔하디 흔한 키스신 하나 없으며(사실 이게 가장 충격이었다), 부감 쇼트로 담긴 두 청년의 옆에 은은하게 비추는 무지개를 통해 밝은 미래를 암시할 뿐이다. 마치 우리들에게도 희망찬 내일이 올 것이라는 듯이. 한마디로, 이 영화는 꽉 막히고 답답한 현실의 탈출구(EXIT) 같은 영화이다. 제목마저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