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
드라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이코지만 괜찮아>가 처음 넷플릭스에 업로드되고 소개됐을 땐 본인은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tvN 주말 드라마들은 대부분 평균 이상의 재미를 보장해주긴 하지만, 김수현이라는 배우는 선호하는 편이 아니었고 여주인공은 잘 모르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여주인공의 배우가 작년에 인상 깊게 본 호러 영화 <암전>의 주인공이었던 서예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영화에서 특유의 저음과 독특한 마스크가 매우 인상 깊었기에, 게다가 이미 감상하고 있던 형의 추천도 있어서 본 드라마를 접하게 되었다.
최근 드라마들은 전형성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을 꾸준히 하는 것 같다는 인상이다. <사이코지만 괜찮아>도 마찬가지로, 기존의 로맨스 드라마의 전형적인 남/여 주인공의 성격을 반전시켰다. 매우 당돌하며(사실 사이코처럼 묘사된다) 욕설을 입에 달고 살고, 적극적으로 남주인공에게 어필하는 여주인공 고문영은 여타 드라마에서 보기 힘들었던 매력적인 캐릭터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 또한 캐릭터극에 가깝다는 느낌이다. 결국 주인공 둘의 케미만으로 7~8 화면 충분히 끝날 이야기에서, 똑같은 플롯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이끌어나가는 것이다.
사실 본 드라마를 처음 접하고 1화까지 감상했을 때, 본인은 이 드라마의 윤리성에 공감하지 못했고 불쾌하게 받아들여졌다. 사이코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제목에서부터, 진짜 사이코 같은 여주인공의 폭력적인 행동과(1화에서는 살인을 주저 없이 저지르려 한다), 남주인공이 정신병원 보호사이며 정신병원이 주 무대가 된다는 것까지. 정신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남주인공이 정신병을 가지고 있는 여주인공을 치료하면서 연애한다는 내용일 거라 예상했고, 얼마 전 KBS에서 방영해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영혼 수선공>처럼 의료윤리적인 면에서 문제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또한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지고 있는 문상태라는 캐릭터까지. 여러모로 위험한 드라마라는 인상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본 드라마는 적절한 방향을 선택했다.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정신병을 치료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릴 적 정서적 학대로 인해 비뚤어진 사람과, 자신의 욕망을 감추고 살아가던 사람이 서로를 알아가며 치유하는 이야기이다.
잊지 말고 이겨내. 이겨내지 못하면 너는 영원히 자라지 않는 어린애일 뿐이야. - 악몽을 먹고 자란 소년 중
이 드라마는 과거 속에 갇혀있던 사람들이 과거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형제인 문강태와 문상태는 과거에 어머니가 살해당한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살인마가 본인들을 쫓아올까 두려워 일 년 주기로 거주지를 옮겨 다닌다. 여주인공 고문영은 과거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정서적인 학대를 당한 경험이 있고, 이로 인해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다. 간호사 남주영은 과거 학교에서 왕따 당한 경험으로 인해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착한 사람 코스프레를 하며 살고 있다. 작중 주 무대인 괜찮은 병원 환자들은 제각각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PTSD, 가족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남편의 가정폭력, 부모의 방치, 딸에 대한 미안함 등을 가지고 과거에 얽매여 있다. 결국 문강태와 고문영은 서로를 만나고 이해함으로써, 문상태는 문강태와 고문영, 병원 사람들의 도움으로써, 남주영은 출판사 대표 이상인을 만남으로써, 괜찮은 병원 환자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모두 과거를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간다.
극 중 후반부에 들어서고 나서, 문강태와 문상태의 어머니를 살해한 범인이 고문영의 어머니라는 것이 밝혀지고, 이로 인해 고문영과 갈등이 생긴다. 자기는 너를 볼 때마다 죄책감이 들어서 안될 것 같다고 말하는 고문영에게 문상태는 이야기한다. "잊지 말고 이겨내면 되잖아."
우리가 믿게 해 줘야지. 날 뺏기는 게 아니라, 함께 있어줄 한 명이 더 생기는 거라고. 남이 아니라 우리가 되는 거라고 믿게 해 줘야지. - <사이코지만 괜찮아>11화 중
본작에서는 여러 가족의 형태가 등장한다. 먼저 어머니가 살해당하고 둘이서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살아온 문강태와 문상태, 그리고 친구인 조재수까지 함께인 독특한 형태의 가족이 있다. 정서적 학대를 서슴지 않던 어머니와 이를 방관하던 아버지를 둔 고문영이 있다(그리고 그녀는 현재 혼자 살고 있다). 어머니와 함께 오손도손 살아가는 남주리도 있다. 이제 문강태와 문상태 사이에 고문영이 끼어든다.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 없이 살아온 고문영은 남주리의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으며, 출판사 직원의 걱정을 받으며, 문강태와 문상태와 가까워지며 사람의 온기와 가족의 소중함을 체화한다. 그렇게 그녀는 감정을 배워나가고, 과거의 상처를 이겨내게 된다.
가족이라는 형태를 강조하는 드라마지만, 그렇다고 가족에 대해서 관용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보지는 않는다. 고문영은 자신에게 정서적인 학대를 가한 아버지 고대환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고대환이 죽음을 앞두고 있자, 주위의 모두는 고문영에게 지금이라도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화해하기를 종용한다. 하지만 고문영은 자신의 아버지는 진작에 죽었다며 끝까지 아버지를 마주하지 않는다. 그리고 드라마는 그런 고문영을 냉혈한 자식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잘못을 용서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본 드라마에서 또 다른 괄목할 만한 지점은 자폐 장애를 다루는 태도에 있다. 드라마에서 문상태의 장애는 여지없이 드러나지만, 이를 조소하거나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려 노력한다(물론 이것은 배우 오정세의 섬세한 연기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유아처럼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순수하고 솔직한 면모를 부각한다. 행동 자체를 우스꽝스럽게 표현해 유머 코드로 승화시키기보다, 순수하고 직설적인 화법과 이에 쩔쩔매는 사람들을 주목하면서 불쾌하지 않게 표현하려 노력한다. 물론 완벽하진 않다. 하지만 여러 방면에서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또한 작중 주요 갈등은 장애인을 돌보는 가족, 부양인이 맞닥트리게 되는 심리적 부담감에서 기인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가며 형을 보살피는 데에 인생의 전부를 바친 문강태의 모습을 비춰주고, 형의 보호자로서만 살아왔던 그가 자기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며 고뇌하는 모습을 비중 있게 다룬다. 그가 고문영을 변화시켰듯이, 그 또한 고문영으로 인해 더 이상 형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고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해주게 되며, 두 형제는 조금씩 서로 간의 타협점을 찾아나간다. 그렇게 그들은 진정한 우리, 가족으로 거듭난다.
후반부로 갈수록 소재의 고갈로 인해 반복되는 플롯과 뻔한 반전 요소, 어설픈 전개에 조금 흥미를 잃기도 했었다. 하지만 로맨스 요소보다도 주인공들의 변화와 성장에 초점을 맞춘 마지막화의 마무리는 두말할 것 없이 깔끔했다. 뻔한 로맨스만을 기대하고 본 드라마였지만, 의외의 따뜻함이 있어서 좋았다.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잔잔한 위로를 전해주는 드라마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