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
필자는 한국 코미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으나, 가장 대표적으로 꼽아보자면 한국 코미디 특유의 감동/교훈을 주려는 듯한 후반부 플롯에 대한 생리적인 거부감, 뻔한 대사들에 대한 기시감, 소수자/약자들을 희화화하는 불편한 개그코드 등이 있겠다. 하지만 이런 거창한 이유들 이전에 그냥 나는 한국 코미디 영화가 웃기지 않는다. 어느 포인트에서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 작년 초에 한창 흥행 돌풍을 일으키던 <극한직업>도 그랬고, 수많은 호평을 받던 한국 코미디 영화들이 전혀 웃기지 않았다. 오히려 작년에 나에게 웃음을 주었던 한국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었다. 씁쓸하면서도 냉소하게 되는 그런 유머 코드. 인정한다. 내 취향은 일반적인 기준과는 몇억 광년 떨어져 있다. 그래서 본인은 애초에 국산 코미디 영화는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큰 웃음을 주었던 영화가 있었다. 10년쯤 전이었나? 본인이 중학교 시절, 친구와 극장에 보러 갔던 <차우>였다. 영화가 끝나자 같이 본 친구는 이게 뭐냐고, 영화가 형편없다면서 짜증을 냈다. 다른 관객들의 반응도 썩 좋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본인은 그 영화를 보면서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어째서 그렇게 웃겼는지까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그 당시에 본 영화 중 가장 내 유머 코드에 맞았던 영화라는 것은 분명했다.
우리 가족은 본인 포함 4명(형, 아버지, 어머니) 모두 소문난 영화광이다. 새로운 신작 영화가 개봉했다 하면, 온 가족이서 주말마다 영화 보러 나들이 나가는 게 일상이다. 한 해에 가족끼리 극장에서 관람하는 영화만 40편쯤 되는 것 같다. 집에서 TV로 보는 것까지 하면 100편은 족히 넘을 것이다. 여하튼 그런 우리는 이번 추석 연휴에도 당연히 영화를 보러 가고자 했다. 하지만 볼 영화가 지지리도 없었다. 모두 부모님, 그리고 내 취향과는 동떨어져 보였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화들의 정보를 찾아보던 중, 이 영화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이라. 조지. A.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 대한 오마주인가?(실제 영화에서 이 작품에 대한 오마주도 있다) 여하튼 촌스러운 제목이다. 제목만 보고서도 '거름각'이 딱 서는 그런 류였다. 그런데 이 영화가 <차우>를 찍은 신정원 감독의 신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극장으로 달려갔다.
우주에서 날아온 외계 종족들이 잘생긴 남자의 탈을 쓰고 여성들을 꼬셔서, 인간의 DNA 유전자를 얻어 인류를 멸망시키려고 한다. 주인공 소희(이정현)는 남편 만길(김성오)이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조사를 의뢰한 사립 탐정 닥터 장(양동근)에게서 남편이 인간이 아닌 외계인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남편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안 소희는 남편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여기서 소희의 동창인 세라(서영희), 양선(이미도)까지 얽히게 된다.
대강의 시놉시스만 봐도 비범함이 묻어 나온다. AI 스피커에게 잠을 더 자야겠다며 말하자, 자동으로 불이 꺼지고 커튼이 닫히며, 그 뒤에 원앙(또는 오리) 인형 둘이 흔들리는 클로즈업 쇼트로 부부의 잠자리를 표현하는 초반 시퀀스는 더욱 비범하다. 영화의 시작부터 웃음을 참을 수 없었고, '이 영화 재밌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대부분의 한국 코미디 영화들은 상황에서 묻어 나오는 아이러니함에 더해 배우들의 과장된 코믹 연기, 거기에 더해 다양한 '드립'으로 점철된 대사들로 관객들에게 웃음을 자아내려 한다. 하지만 그 영화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코미디나 호러처럼 관객의 감정을 롤러코스터에 탑승시켜야 하는 이런 장르 영화들은, 기본적인 연출력이 받쳐줘야 영화의 제 몫을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대다수의 코미디 영화는 내러티브가 빈약하기 마련이다. 이를 뒷받침해줄 연출력이 없다면, 몰개성하고 평범한 연출에 과장된 연기, 휘발성 짙은 대사들만 있는 코미디 영화들은 그 순간에는 웃음을 자아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기억에 오래 남지도 않을뿐더러 훌륭한 장르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신정원 감독의 전작 <차우>, <점쟁이들>, <시실리 2km>등을 되돌이켜 보면, 몇몇 시퀀스들에서 기본기가 잡혀있는 세련된 연출력이 엿보인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들은 허무맹랑하고 황당한 이야기를 관객들이 납득 가능하게 풀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세련되었냐 하면 결단코 아니라 말할 수 있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시작해서 줄거리마저 B급 감성이 짙게 묻어난다. 7~80년대 할리우드 영화들에 대한 오마주가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온다. 이야기에서 현실성은 초반 10분 안에 사라진 지 오래고, 이걸 이렇게 넘어간다고? 싶은 부분도 한 두 군데가 아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웃음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곤란한, 난감한 상황들을 극속에서 조성하고 관객들을 그 세계 안으로 끌어들이는 부분에서는 탁월하다. 배우들의 연기 톤은 코미디보다는 정극 연기에 가깝다. 극중 캐릭터들은 시종일관 진지하게, 살아남기 위해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행동한다. 이런 비합리적인 요소들이 엮이며 결국 영화 자체의 톤이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물론 관객 모두가 빵 터지는 강렬한 요소들은 없다. 하지만 취향이 맞는 관객들이라면 영화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배를 부여잡으며 킥킥거리고 보게 되는 매력이 있다.
같이 관람한 가족들 중 아버지를 제외한 본인과 형, 어머니는 매우 만족하면서 보았다. 그러나 여러 평들을 찾아보니, 황당하고 웃기지도 않는다는 혹평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본인에게는 이 영화가 근래 5년간 본 것 중 가장 웃긴 영화였지만, 역시나 이런 B급 코드가 대중적인 입맛에는 맞지 않는구나 하고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이 코드만 맞는다면, 영화에서 개연성과 핍진성에 얽매이지 않고 장르적 허용치가 너그러운 관객이라면, 쌈마이 한 개그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두말할 것 없이 최고의 영화라고 자신할 수 있다. 이런 스타일에 끌리는 분이라면 한 번쯤 보러 가도 괜찮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