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적인 시간의 섬 - 베네세 아트사이트 나오시마
호기심에 무작정 따라간 여행이었다
지난 여름, 미술관 큐레이팅과 문화기획 일을 하는 지인들과 일본으로 여행을 갔다. ‘나오시마’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 일본의 섬이었다. 그들에겐 현장 답사이자 짧은 휴가였고, 나는 호기심에 무작정 따라간 여행이었다.
“베네세 아트사이트 나오시마 (Benesse Art Site Naoshima)”는 일본 가가와현의 나오시마 섬, 데시마 섬, 오카야마 현의 이누지마 섬을 기반으로 한 일본 대표 교육기업 베네세 그룹이 이끄는 예술 활동이다. 베네세 아트사이트 나오시마는 기업의 문화예술 활동 지원, 자연환경과 건축과 예술작품의 조화, 지역재생이라는 가치를 구현한 성공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늦은 밤, 오카야마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조식을 먹고 항구로 향했다. 유람선보다 작은 배를 타고 30분쯤 갔을까, 테시마 항구에 도착했고, 나를 포함한 일행 5명은 동네 슈퍼 같은 곳에서 자전거를 대여하였다. 처음으로 향한 곳은 테시마 아트 뮤지엄이었다.
테시마 아트 뮤지엄 Teshima Art Museum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여러 차례 올랐을까, 낮고 둥근 봉우리에 하얗고 깨끗한 반구의 건축물 2개가 녹색 풀 사이로 살짝 솟아있었다. 자전거가 모여 있는 곳에 자전거를 주차하고, 하얗고 네모나게 생긴, 낮은 산봉우리 안에 비스듬히 나와 있는 매표소 공간에 들어가 입장표를 구매했다. 우리 일행은 젊은 가이드를 따라 뮤지엄으로 이동했다.
바람과 빛과 물, 공기가 있었다. 물은 바람이 향하는 곳을 따라 찬찬히 흘러갔다.
마치 중력이 반대로 흐르는 듯했다.
좁고 깔끔하게 정돈된 산길을 따라 걸으니, 바로 앞에 바다가 보였다.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콘크리트 조형물(인지, 예술품인지, 혹은 바다에 필요한 기구인지 모를)이 햇빛을 받아 마치 생명력을 띄는 듯했다. 조금은 감상하고 가라는 듯 그 조형물이 보이는 바로 그 자리에, 소박한 벤치가 놓여 있었다.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 좀 더 걸었다. 뮤지엄 입구 근처에 다다랐을 때, 가이드가 신발을 벗으라고 했다. 흙을 밟던 신발을 낮은 신발걸이에 놓고, 조형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바람과 빛과 물, 공기가 있었다. 물은 바람이 향하는 곳을 따라 찬찬히 흘러가고, 큰 물 덩어리로 모이기도 했다. 마치 중력이 반대로 흐르는 듯했다. 바닥에 흐르는 물이 나의 맨발에 닿아 차가움이 느껴졌다. 반구 특유의 구조 때문에 사람들이 스치는 바닥의 소리가 다시 메아리쳐 울리고, 작은 속삭임이 또 다시 작은 속삭임이 되어 전해졌다. 이 인공물은 자연의 감각을 느끼게 해줬다. 치밀하게 계산된 감각적인 경험 속에서, 나는 조금 소름이 끼쳤다.
이곳을 지키는 스태프들은 관람객의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히 바라보고,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작품을 만지는 것이 있다면 주의를 줬다. 물 한 방울을 손으로 만지는 것까지도 주의를 줬는데, 조금은 지나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작품에 대한 주의 깊은 태도와 매너를 고수하는 듯한 모습이 조금은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번 여행의 첫 관문은 너무나도 큰 압도감을 주었고, 무엇이 ‘예술’인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 펼쳐질 이 여행의 경이로움이 조금은 예상이 갔다….
TESHIMA SEAWALL HOUSE
어떤 공간에도 표지판이나 크게 붙인 안내 문구가 없었다.
다음으로 간 곳은 TESHIMA SEAWALL HOUSE였다. 이 섬은 지도를 따라 알음알음 가는 맛이 있었다. 그 어떤 공간에도 표지판이나 크게 붙인 안내 문구가 없었다. 일본의 평범한 주택과 다름 없어 보이는 곳에 들어가니, 집의 진동이 있거나 바람이 불 때의 흔들림으로 쳐지게끔 해놓은 드럼이 있었다. 그리고 큰 공간을 할애해 놓은 영상 설치 작업이 있었다. 바깥 빛을 커튼으로 가려놓아 어두컴컴한 곳에서 영상을 감상했다. 그러다 영상의 클라이막스 부분-바깥으로 뛰어내리는 주인공의 모습과 동시에 실제 커튼이 획 걷어지며 보이는 바다의 수평선과 일치-에선 역시 사소하지만, 뇌리에 깊은 경험을 주었다.
Les Archives du Cœur
마무리는 볼탕스키의 심장박동 소리 아카이브이자 그의 작품이 있는 곳이었다. 이곳 역시 바다가 바로 앞에 보이는 모래 사장 위에 지어진 건축물이었는데, 새로 지어진 건축물이라기보다는 화려하지 않지만, 기능에 충실한 누군가의 별장 같은 모습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매표 공간에는 의사 가운을 입은 두 명의 직원이 있었다. 작품 감상실이라고 해도 될 만한 어두컴컴한 공간에 전구가 누군가의 심장박동 소리를 따라 꺼지고, 빛나고 있었다. 누군가의 심장 소리를 듣는 것은 매우 경건한 경험이었다. 컴퓨터 3대가 놓인 다른 공간에선 볼탕스키가 지금까지 아카이빙한 다른 사람들의 심장 소리가 나라와 장소에 따라 들을 수 있었다.
나의 심장 소리도 작품감상실에서 들을 수 있었다.
나의 기록이 작가의 작품 일부가 되고, 그것을 고운 패키지에 담아 소장하고 기념화하는 방식은 전혀 ‘장사’의 맥락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작은 공간에서 자신의 심장 소리를 녹음해서 볼탕스키의 아카이빙에 추가하고, 그 소리를 CD와 함께 특별한 패키지에 판매하고 있었다. 나의 심장 소리를 직접 작품감상실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곳에 있던 다른 친구들, 관객들과 나의 심장 소리를 함께 들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나의 기록이 작가의 작품 일부가 되고, 그것을 고운 패키지에 담아 소장하고 기념화하는 방식은 전혀 ‘장사’의 맥락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Art House Project
둘째날 방문한 나오시마 섬에는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수상자 브루스 나우만, 안토니 곰리, 잭슨 폴록, 데이비드 호크니, 백남준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과 미술관들이 있다. 또한, 쿠사마 야오이, 스기모토 히로시, 레이 나오토 등의 일본 작가들의 작품 또한 있다. 하지만 이 날 우리의 우선 순위는 ‘Art House Project’였다. 섬의 동쪽에 위치한 혼무라 지구에 인구감소와 고령화로 빈집이 늘어감에 따라 지역의 활성화를 목표로 시작된 예술 활동으로, 폐가와 공터를 활용하여 상설 전시하고 있는 프로젝트이다. 쉽게 말하자면, 빈집이 예술 활동의 장소가 된 것인데, 7개의 장소를 지도를 보고 걸어 다니며 경험했던 것은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었다.
몇 군데의 장소는 예약이 필요했다. 15분에 1명, 하루에 정원만 받는 곳도 있었다. 이 또한 작품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점이었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하고 제임스 터렐이 작품을 설치한 ‘미나미테라’. 예약을 하고 간 곳이었다. 30분에 대략 5~10명 정도의 관람객만을 통과시키는 것 같았다. 안도 다다오는 원래 절이 있었던 절을 선택, 절에 대한 오마주로써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목조 공간을 만들었다. 정말 새까맣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이라, 가이드의 도움을 받으며 입장해야 했다. 형체도, 소재도 알 수 없는 내부의 벽을 만지며 가이드의 목소리를 지도 삼아 따라갔다. 지하 같은 차가운 공기, 목소리와 손과 손을 붙잡아 듬성듬성 걸어가며 어떤 곳에 앉을 수 있었다. 들리는 건 역시 누군가의 작은 속삭임뿐. 7분쯤을 앉아 있었을까, 갑자기 아주 얕고 뿌연, 하얀빛이 보였다. 그 면은 제임스 터렐 작품 특유의 큰 사각형 크기였다. 그 하얀 빛은 서서히 더 선명해지고, 나는 갑자기, 무언가의 울컥함을 느꼈다. 스텝의 얘기로는 그 빛은 원래 처음부터 있었던 빛이라고 한다. 어둠 속에서 앉아있던 7분은 눈이 어둠에 적응되는 시간이고, 그 7분이 지나서야 관객들은 빛을 발견한 것이었다. 자연에 적응하는, 어쩌면 사람의 가장 자연스러운 성질에 대한 의문이었다.
Naoshima Bath “I♥︎湯”
이외에도 기억에 남는 작품은 신로 오타케의 Naoshima Bath “I♥︎湯”이었는데, 그의 작품이자 목욕탕에서 나오시마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실제 목욕을 할 수 있는 목욕탕에서의 목욕은 다소 신기한 경험이었는데, 말그대로 현대 미술 작품 속에서 목욕했기 때문이다. 목욕탕에서 수건, 샴푸와 같은 목욕에 필요한 제품들을 파는 것처럼 이곳에서도 팝하게 디자인된 수건과 사우나 복장 같은 것들을 팔았다. 나는 기념품을 산다 생각하고 수건 하나를 샀고, 의도치 않게 목욕을 한 곳에서 실제 사용했다. 목욕탕 앞에서는 500엔 아날로그 뽑기기계가 2개 있었는데, 신로 오타케 작품 미니어쳐였다. 문방구 앞에서 뭐가 나올지 설렘과 함께 기념품을 산다는 모종의 합리화로 동전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나오시마 일정을 마치고, 배를 타고 다시 오카야마로 향했다. 분명, 이 섬에 ‘예술의 섬’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그 섬세한 기획과 작품의 수준, 인상적인 감동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분명 ‘예술’적인 섬이었다.
여행을 다녀온 지 꽤 지나고 나서 누군가에게 간단하게 설명할 때 ‘예술의 섬’이라는 표현을 썼다. 하지만 사실,
베네세하우스 아트 사이트 여행을 설명하기에는 그 감동의 수준이 미치지 못하는 부족한 표현이다.
베네세하우스 아트 사이트는 무엇이 달랐을까?
첫째, 작품의 장소 특정성이다. 기업이 주로 하는 아트컬렉션과 재단 소장품의 한계를 넘어선, 건축과 작품, 장소가 한 맥락 안에 이어져 있다. 미술관 작품의 다수는 나오시마, 테시마의 단 하나의 장소를 위해 제작된 작품들로 구성단계에서부터 작가와 건축가 사이의 긴밀한 협업을 통해 이루어졌다. 연계성을 가진 작품들이 조화롭게 존재하는 형태인 것이다.
둘째, 수준 있는 작품 콜렉터의 지속적인 후원과 일관된 의지이다. 약 30년간 꾸준히 전개되고 있는 이 프로젝트 투자자 및 기획자의 확고한 철학 없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베네세의 후쿠타케 소이치로는 건축가 선정과정에서도 ‘일본의 자연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외국인을 배제하였고, 도쿄나 대도시 출신의 건축가 또한 우선 제외했다고 한다. 작가 선정에 있어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여 일관된 방향성을 갖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셋째, 상업적인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지역민에게 사업의 운영을 일임하며, 지자체와의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3년에 한 번씩 이루어지는 트리엔날레의 지역주민 세미나 프로그램, 지역사회의 재생을 기원하는 모내기 퍼포먼스에서 시작된 ‘예술과 쌀의 수확제’에서 수확되는 쌀은 나오시마 섬의 발전에도 보탬이 되고 있다. 작게는 실제 지역주민들이 참여한 예술 작품들이다.
넷째, 소비자와의 다양하고 특별한 접점들이다. 미술관과 호텔이 일체화된 ‘베네세하우스’는 구상단계에서부터 ‘체류형 미술관’을 의도하여 자연, 예술, 건축이 한데 어우러지는 특수한 사례이다. 작품들은 미술관 내뿐만이 아닌 외부의 해안, 숲속, 집, 길에 설치되어 있다. 또한, 앞서 경험했던 볼탕스키 아카이빙 전시에서의 심장 소리 녹음과 이를 음반패키지로 판매, 실제 목욕을 할 수 있는 작품 ‘I♥︎湯’ 등 풍부한 경험들의 연속이었다. 또한, 거의 모든 작품의 사진 촬영을 엄격히 제지했으며, 작품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있는 스텝들 등 작은 요소들까지 이곳을 특별하게 경험하는 요소가 되었다.
나오시마에 대체 뭐가 있냐구요? 와보면 알게 됩니다.
내용 및 이미지 출처:
<문화예술지원을 통한 기업의 지속가능한 지역활성화 전략> - 이재은 (2014)
2019년, 세토우치 트리엔날레에 함께 가요.
BXRS | 윤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