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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만 믿어.

책임에 대하여

by 이정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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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책임감 없는 사람 ◀◀◀


.......

저는 책임감이 강합니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도록 교육받아,

무슨 일이든 시작을 하면 최선을 다해 그 책임을 다했습니다.

.......


흔하게 자기소개서에서 볼 수 있는 표현인데 어느 순간부터 이 문구를 사용한 이력서는

오히려 주의 깊게 보지 않는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책임감'이 강하다는 강렬하고 좋은 표현임에도 내가 중요하게 안보는 이유는


실제로는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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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1.

중소기업 A는 5~6여 명 직원의 작은 회사로 경기도 남부에 위치해 있고 주로 국외의 반도체 공장 설치와 관련된 일을 한다. A 회사는 대표 아래 부장, 차장, 과장, 대리, 주임의 옛날식(?) 직급체계를 가지고 있다.

얼마 전 A 회사 대표이자 대학 동기가 중국 일을 마치고 귀국한 다음 날 나를 만나러 왔다.


"오랜만이야. 중국 출장 갔다면서 언제 들어왔어?"

"며칠 전에"

"출장이 힘들었나 봐, 얼굴이 많이 상했네?"

"말도 마. 3개월 동안 직원들 데리고 가서 일하는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어서..."

"무슨 일?"

"아니, 중국에 직원들 모두 데리고 가서 작업하는데 일 끝나고 나면 저녁 겸 한 잔씩 하자나.

그런데, 직원들을 관리해야 할 부장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저는 여기 오고 싶지 않았는데
사장님 보고 와서 일하는 거 아시죠?


"다른 직원들 있는데서?"

"응, 그렇다니깐"

"그래서 어떻게 했어?"

"내가 기분 상해서 뭐라고 하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수도 있고, 부장이 틀어져서 한국으로 귀국하겠다고 하면 오더 계약금은 받아놨겠다 위약금을 배상해야 하고 현지에서 갑자기 사람을 구할 수도 없잖아.

그래서 허허 웃으면서 내가 O부장한테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늘 든든하게 생각한다며 자 자 그러지 말고 한 잔 하셔 오늘 맛있는 걸로 먹자고 하면서 달랬지"

"현명하게 잘 대처했네, 잘했네 마음은 상했겠지만..."



회사의 O부장은 아마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수개월동안 타지 출장을 하는 본인의 업무에 비해 충분한 금전적 대우를 받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계약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출장지에서도 정해진 업무 이 외의 시간(퇴근 후부터 출근 전까지의 시간)을 보상해 주는 회사도 있고 출장비라는 명목으로 처리하거나 급여 이외에 챙겨주지 못하는 회사도 있는데 대부분 직장인이 생각하는 받아야 할 금전적 보상 금액보다는 부족할 경우가 일반적일 것이다.


불만이 쌓인 O부장은 여러 직원들과 함께 하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말은 돌려했지만 실제로는 '몇 개월동안 해외 출장을 나와서 일하는데 너무 박한 거 아니요? 수틀리면 난 언제라도 귀국할 수 있는데 사장님이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할 것이오'라는 말을 에둘러한 것이라 짐작한다.


Korean-Air-dep-Syd-2048x1365.jpg 대한항공


만약, O부장이 실제로 한국으로 귀국해 버렸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만약, 내가 거기 사장이었다면 어땠을까?

그 친구처럼 현명한 대처를 할 수 있었을까?

갑과 을이 바뀐 상황의 사장을 직원들이 굴욕적으로 대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O부장은 두 가지 실수를 했다.


1. 처우에 관한 문제였다면 사장과 둘이 있을 때 이야기해도 충분했을 것 같다.

2. 사장을 포함한 회사 사람들에게 O부장은 '책임감이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사례 2.

다음 날 결혼한다는 후배 선생님한테 공방에서 만든 술을 결혼답례품으로 12여 병 보낼 일이 있었다. 크래프트 박스에 유리로 된 술병을 담고 에어캡으로 하나씩 포장을 한 후 다시 스티로폼 상자 안에 정성스러운 마음도 가득 담아 앱으로 호출하면 픽업 서비스를 제공하는 R택배를 호출했다. 자주 보는 기사님이 오셨고 '유리병이라 특별히 잘 부탁드린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다음 날 후배 선생님한테 카톡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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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병이 왔긴 왔는데요. 1병은 깨지고 3병 정도 박스가 모두 젖었어요."

"아이고 이런 그렇게 주의를 해달라고 했는데도 큰일이네.

일단은 박스를 교체할 수 있는 박스 몇 개랑 깨진 술은 내가 다시 보낼게"

"감사해요. 그런데 저희 쪽에서 배달 오신 기사님이 뭐라고 한 줄 아세요?

내용물이 뭐냐고 묻길래 제가 수제 술이라고 하니깐. 하루 동안에 발효돼서 깨진 것 같다는 거예요"

"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와인이 무슨 폭탄도 아니고. 하루 동안에 그 정도 발효가 되지도 않을뿐더러.

만약에 터졌다면 12병 모두 터져야지"

"그러게요"


일단 R택배 기사님께 전화를 드려서 상황을 설명했다.

R택배 기사님은 '여기서 아무리 주의를 줘도 중간 배송 단계에서 취급을 주의하지 않아서 그러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받으신 고객한테 우리가 주의를 못한다고 인정하고 책임을 지겠다고 해야 하는데 '그쪽 배송기사가 이제 일을 막 시작한 초보 기사님이거나 아니면 책임감이 없는 사람 같다'며 본인이 직접 후배 선생한테 전화를 드려 사과를 해도 되겠냐고 했다. 기사님의 사과 전화를 받은 예비신랑 후배선생은 기분이 풀어졌고 다행스럽게 결혼식 전에 내가 추가로 보낸 결혼답례품 수제술도 잘 도착했다.

나도 물론 결혼식장에 가서 여러 지인을 만나고 식사도 맛있게 잘하고 왔다.


예비 신랑한테 택배를 배송한 기사님의 실수는 단 하나다.


1. 택배 취급 도중 발생한 파손 사고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을 텐데

2. 그 술에 대해 잘 모르면서 '발효'와 엮어 괜히 여러 사람의 마음을 더 상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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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술은 다시 만들면 되지만

깨진 마음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술 병을 깨지게 하는 건 외부의 강한 충격이지만

마음을 깨지게 하는 건 사람의 부드러운 혀다.

오늘 혹여 누구의 마음을 깨지게 했다면 내가 책임지고 싶다.


미안해. 상처 줘서.





- 안산술공방 이정욱 의학전문작가

- 공방 주소: http://kwine911.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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