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토(弁当)는 마쿠노우치(幕の内)
1998년은 IMF로 모두가 힘든 시기였다.
은행이 파산하고 회사는 부도나고 공장들은 문을 닫았다.
어제까지 가장이었던 우리 아버지들은 하루아침에 채무자가 됐고,
하루가 멀다고 누군가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뉴스가 사회면에 실렸다.
많은 이들이 이제부터는 혼자 벌어서는 살 수 없고,
직장이라는 게 평생 다닐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고,
계약직이라는 낯선 용어를 처음 접했던 것도 그때였다.
돌봄을 받아야 할 초등학생 중 상당수가 먹고살기 바쁜 부모의
고통을 고스란히 같이 짊어지며 점심을 굶었다.
부모가 있어도 그랬으니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오죽했을까.
본격적인 급식이 시작된 1998년에서야 굶는 아이들이 고통스러운 점심시간에서
벗어났으니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면 지금은 30대 중반이 되었겠다.
나는 엄마가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보내던 시절을 지나왔다.
옆으로 뉘어 책가방에 넣은 양은 도시락에서는 김치국물과
채반볶음의 기름이 섞여 샜고
빨갛게 물든 교과서와 학습장을 보며 한 학년을 보내왔다.
이후에는 용량이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보온도시락이 나왔다
겨울 무렵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열면 모락모락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도시락에
담긴 밥이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워 좋았고 부잣집 귀한 아들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특별한 날에나 먹을 수 있던 김밥이 김밥OO에서 1,000원에 한 줄을 팔기 시작했고,
소득이 올라가고 외식업 시장이 커지면서 도시락을 구경하기 어려워졌다.
중국우한폐렴(코로나 19)이 끝남과 동시에
실물경기는 추락하고 금리가 오르면서
다시 직장인들이 점심 도시락을 싸서 다니는 모습을 보게 됐다.
알뜰살뜰하기로 소문난 일본은 도시락 문화가 예쁘게 발달했다.
요즘도 대부분의 사립 중등학교, 고등학교는 개인이 도시락을 준비해야 하며
초등학교 학생이라고 할지라도 운동부에 소속된 아이는 영양이 부족하지 않도록
개인적으로 도시락을 준비해야 한다.
일본 엄마들은 자녀 도시락을 정성스럽게도 만들어준다.
맛은 기본이고 아이가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 모양으로 도시락을 만들어주는데
이런 도시락을 캬라벤(キャラベン, 캬라쿠나 벤토)이라 한다.
아이를 키운 분이라면 알겠지만 아이들은 엄마가 싸운 도시락을 점심때 서로에게
보여주고 자랑하는데 솜씨가 좋은 엄마 도시락은 온 학교에 소문이 나며,
일본 엄마들끼리 만나면
'OO엄마는 어쩌면 솜씨가 그렇게 좋으세요!'
'저희도 좀 알려주세요!'
'너무 예쁘게 하시니깐 저희가 구박받아요!' 라며 칭찬하기 바쁠 정도니
아이들 도시락을 대충 싸줄 수가 없다.
이렇다 보니 엄마들은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만을 기다리지만
아이들은 평생 동안 엄마가 싸준 도시락에 담긴 사랑을 기억하며 자란다.
일본에서는 직장을 다녀도 도시락을 싸서 다니기도 하지만
편의점 도시락이 너무 잘 나오는 데다가
네오포차(ネオ屋台, 네오 야타이)라고 하는 도시락을 전문으로 파는 트럭에서 구입한 도시락을 회사 근처
공원에서 혼자 먹는 직장인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김치, 나물, 국, 찌개, 탕처럼 우리나라 반찬은 습한 편이지만
일본은 구이, 튀김, 조림, 장아찌처럼 물기가 없이 간이 된 음식문화라서 냄새도 덜하고
취급하기가 편할뿐더러 식재료 오염 문제도 없는 편이라 도시락 문화가 더 발달할 수 있던 것 같다.
일본 도시락의 표준은 흰 밥 위에 흑임자가 뿌려지고, 구운 고등어 한 조각, 가마보코라고 하는
간장에 조린 어묵, 계란말이나 소시지가 들어간 국민벤토 마쿠노우치(幕の内)가 가장 유명하다.
경제가 가라앉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도시락을 싸서 다니는 걸 보니 마음이 무겁지만
한 편으로는 잊고 지냈던 도시락이 주는 따뜻한 감정이 살아나기도 한다.
직장인, 자영업자들, 사장님들 모두 다 딸린 식구들 잘 챙기고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최악의 더위라고 하는 올해 여름을 건강한 술과 함께 잘 이겨내시길 응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