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네 큰 어른 -
인류가 문자를 만들어 글을 쓰고, 우리네 땅에서 오천년 역사를 이어 글을 지어 온 이래로 가장 걸출한 명문장을 썼다 손꼽히는 일인은 바로 연암 박지원이다. 선생은 노론의 명문가에 나고도 과거를 통한 입신을 단념하고 이용후생의 학문에 힘쓰며 이를 어떻게 삶에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 신분과 나이를 뛰어넘어 사귄 벗들과 더불어 논하며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했다. 젊은 시절부터 써 온 문학작품 <예덕선생전>과 <양반전> 등으로 조선의 위선적인 사회상을 풍자하기도 했으며, 삼종형을 따라 간 열하로의 여정에서 써 남긴 <열하일기>에서는 청문명의 최고가는 볼거리는 깨어진 기왓장과 똥거름이라 하며 북벌의 그릇됨과 북학으로써 조선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이는 또한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조선 후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한 선비로서 철학과 문학, 경세학, 천문학, 농학 등에 두루 위업을 남긴, 옛것을 본받아 새로이 창조하라는 법고창신의 사상을 주창한 북학파의 영수, 연암 박지원 선생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선생의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영조십삼년(1737) 한양의 서부 노론 집안의 자손이자, 아버지 박사유와 어머니 함평이씨의 둘째 아들,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인 박필균은 여러 관직을 지내며 정2품에 오른 노론의 중진이었으며, 먼 친척 어른으로 南溪 박세채가 있었고, 영조대왕의 부마에 올라 차후 함께 연행을 가게 되는 삼종형 박명원이 있었다. 선생은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 댁에서 자랐으며, 16세에 장가를 들어 처가에서 본격적으로 학문을 익혀 나가기 시작했다.
선생은 학문을 익히면서도 일찍부터 여러 문학작품을 집필하였는데, 걸인의 절의와 양반의 허욕을 대비시켜 비판한 <광문자전>, 인분을 져 나르며 살아가는 엄행수의 삶에서 오히려 깊은 덕성을 발견하는 <예덕선생전>, 양반의 부패와 허위를 풍자한 <양반전> 등 청년기와 장년기에 11편의 소설을 썼다고 전해지나 오늘날엔 9편만이 남아있다. 영조사십육년(1770)엔 과거시험에 응하여 초시에 장원급제하고 영조대왕에게까지 그 문장의 수려함을 떨쳤으나, 당파분쟁으로 물든 위정자들과 분에 넘치는 출세를 경계하여 돌아오는 회시에 백지를 내고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의 뜻을 접었다.
선생이 삶을 살아가고 사상을 넓히며 예술 활동을 펼쳐 나가는 큰 원동력 중 하나는 벗이었다. 청년기부터 앓던 우울증과 불면증을 극복하고 방랑하던 청장년의 연암을 다잡아 준 것은 다름 아닌 우정이었던 것이다. 그런 연암은 벗들과 함께 금강산을 비롯한 조선팔도의 이곳저곳을 유람하기도 했으며, 나이와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 수많은 이들과 다방면으로 교우했다. 선생은 20대 초반부터 담헌 홍대용과 유득공, 이서구, 초정 박제가 등과 교류했는데, 이들의 나이 차이는 많게는 20여 년이나 되었고 그중엔 서얼 출신인 이가 또한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우정에는 거리낌이 없었고 평생토록 지속되었다.
영조사십사년(1768) 선생이 오늘날 탑골공원에 위치한 백탑(원각사지십층석탑) 근방으로 이사를 가며 그 우정은 더욱 공고해졌다. 백탑을 중심으로 이웃하던 연암과 벗들은 이른바 백탑청연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이용후생에 대한 깊은 학문적 교우를 통해 북학 사상을 태동시키고 나아가 조선의 사상계를 이끌어 나갔다. 더욱이, 이들이 서로를 사귐에 신분과 나이를 넘어섬으로써 교류하는 학문과 풍류의 영역 또한 망라할 수 있었다. 수년 후 선생은 황해도 금천군 연암협으로 은거하며 몇 년간 지내게 되기도 하지만 그 교류는 계속 이어졌다.
선생이 지어 남긴 글 중 한시와 묘지명은 그 수가 매우 적다. 그럼에도 그 문학적 예술성은 매우 뛰어나 이를 함께 소개하고자 하니, 선생이 맏누님의 사후에 쓴 묘지명과 형님의 사후에 지은 한시가 그것이다. 맏누님의 묘지명은 선생의 산문 중 으뜸으로 꼽히며 형님을 회상하며 지은 한시 <燕岩憶先兄; 연암에서 선형을 생각하다> 또한 선생의 손꼽히는 수작이다. 먼저 누님의 묘지명으로 지은 원문과 해석은 다음과 같다.
伯姊 贈貞夫人朴氏墓誌銘
맏누님 증贈 정부인貞夫人 박씨 묘지명
孺人諱某。潘南朴氏。其弟趾源仲美誌之曰。孺人十六。歸德水李宅模伯揆。有一女二男。辛卯九月一日歿。得年四十三。夫之先山曰鵶谷。將葬于庚坐之兆。伯揆旣喪其賢室。貧無以爲生。挈其穉弱婢指十。鼎鎗箱簏。浮江入峽。與喪俱發。仲美曉送之斗浦。舟中慟哭而返。嗟乎。姊氏新嫁。曉粧如昨日。余時方八歲。嬌臥馬效婿語。口吃鄭重姊氏羞。墮梳觸額。余怒啼。以墨和粉。以唾漫鏡。姊氏出玉鴨金蜂。賂我止啼。至今二十八年矣。立馬江上。遙見丹旐。翩然檣影。逶迤至岸。轉樹隱不可復見。而江上遙山。黛綠如鬟。江光如鏡。曉月如眉。泣念墮梳。獨幼時事。歷歷又多。歡樂歲月長中間。常苦離患憂貧困。忽忽如夢中。爲兄弟之日。又何甚促也。
유인孺人의 휘諱는 아무요 반남潘南 박씨이니, 그 아우 지원趾源 중미仲美(연암의 字)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유인은 열여섯에 덕수德水 이씨 택모宅模 백규伯揆에게 시집가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두었으며, 신묘년(영조47/1771) 9월 초하룻날에 삶을 마쳤으니 향년 마흔셋이었다. 남편의 선산이 아곡鵶谷에 있었으므로 장차 그곳 경좌庚坐의 묘역에 장사하게 되었다.
백규는 어진 아내를 잃은 데다 가난하여 살아갈 방도가 없게 되자, 그 어린 자식과 여종 하나를 이끌고 크고 작은 솥과 상자 등속을 꾸려 배를 타고 협곡으로 들어갈 양으로 상여와 함께 출발하였다. 나는 새벽에 두포斗浦의 배에서 그를 송별하고 통곡한 뒤 돌아왔다.
아아, 슬프도다! 누님이 갓 시집가는 날 새벽에 단장하던 일이 어제런듯하구나. 내 나이 그때 막 여덟 살, 응석스럽게 드러누워 말처럼 뒹굴고 신랑의 어투를 흉내 내려 더듬거리고 점잔 빼며 말을 거니, 누님이 수줍어하다 그만 빗을 내 이마에 떨어뜨렸다. 나는 성을 내어 울며 분가루에 먹물을 섞고 거울에 침을 발라 더럽혔다. 그러자 누님은 옥압玉鴨과 금봉金蜂을 꺼내 나에게 주며 울음을 그치도록 달랬었는데, 지금으로부터 스물여덟 해가 지났구나.
강가에 말을 멈춰 세워 저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銘旌 나부끼고 돛 그림자 너울거리는데, 강굽이에 이르자 나무에 가려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여 문득 강 너머로 보이는 검푸른 산이 마치 누님 시집가던 날 쪽진 머리와 같았고, 강물 빛은 그때의 거울 같았으며, 새벽달은 누님의 고운 눈썹과 같았다.
눈물을 흘리며 누님이 빗 떨어뜨렸던 때를 생각하니, 유독 어렸을 적 일이 또렷이 떠오른다. 그때에는 또한 즐거움도 많았고 세월도 더디더니, 중년에 들어 노상 우환에 시달리고 가난을 걱정하다 시간은 훌쩍 꿈결처럼 지나갔구나. 누님과 남매 되어 지냈던 날들은 어찌 그리 속히도 흘러갔던고!
去者丁寧留後期。떠나는 이 정녕 다시 온다 기약한들
猶令送者淚沾衣。보내는 이 눈물로 옷깃을 적시거늘
扁舟從此何時返。조각배 이제 가면 언제 돌아올꼬
送者徒然岸上歸。보내는 이 언덕 넘어 돌아가네
연암의 벗인 이덕무는 이 묘지명을 읽고서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했고, 또한 다음의 시를 읽고도 깊이 감동하여 극찬한 바 있다고 한다. 정조십일년(1787), 연암의 하나뿐인 형 박희원이 향년 58세로 세상을 떠나자 연암협 뒤 형수의 곁에 합장하고서 형을 그리며 지은 시로,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형을 보며 그 마음을 달랬는데 이제는 형마저 세상에 없으니 스스로 의관을 정제하고 냇가에 나아가 자신을 비춰 봄으로써 형과 아버지를 회상한다는 내용이다.
我兄顔髮曾誰似 우리 형님 낯과 수염 누구를 닮았던고
每憶先君看我兄 아버님 그리울 적 우리 형님 보았는데
今日思兄何處見 이제 형님 생각나면 어드메서 뵈올련가
自將巾袂映溪行 스스로 의관하고 시내에 나가 비춰보네
정조사년(1780), 선생은 일생일대의 계제를 마주하니 바로 연경(베이징)에 다녀올 기회가 생긴 것이다. 바로 이 해 청나라 6대 황제인 건륭제가 칠순을 맞이하여 조선은 청에 사신을 보내야 했고, 영조대왕의 부마(임금의 사위)이자 연암의 삼종형이었던 박명원이 사신단장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연암은 팔촌형을 보필하며 견문을 넓히라 임명된 자제군관의 신분으로 함께 연행길에 오르게 된다.
이 연행을 통해 <열하일기>라는 세계제일의 여행기가 탄생한다. 연암의 무르익은 문장력과 당시 중화문명의 최절정기에 달하던 청조의 문화 그리고 조선인 최초로 발을 디디게 되는 열하로의 여정, 그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연암의 문장은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소설과 같은 단편을 함께 어우렀으며, 때로는 익살스럽고 때로는 따사로우며, 깊은 이치와 깨우침을 논할 때면 극히 아름답고도 웅장하다.
<열하일기> 속 여정의 시작은 압록강을 건너면서부터 시작된다. 연경을 향해 가던 선생은 요동 벌판에 이르러, ‘이 대지야말로 좋은 울음터라’는 호곡장론을 펼치는데, <열하일기> 명문장의 시작이 이와 같다.
· · · 내 오늘에 처음으로, 인생이란 본디 아무런 의탁할 것 없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말을 멈춰 세워 사방을 둘러보다 나도 모르는 사이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아, 한바탕 통곡하기 좋은 울음 터로다.”
탄복하니 정 진사가,
“천지간에 이토록 드넓은 대지를 마주하시고는 별안간 통곡할 것을 말씀하시니, 어찌 해서인지요.”
하고 묻자 나는,
“그러니, 글쎄. 천고의 영웅들은 곧잘 울고 미인들은 눈물이 많다하나, 그들은 몇 줄기 소리 없는 눈물만을 옷깃에 흘린 정도에 불과하지. 그 울음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 마치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와 같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사람들은 단지 칠정(七情) 중에 오로지 슬픔만이 울음을 유발하는 줄 알고 있으나, 칠정 모두로 울음을 자아낼 수 있음을 모르오. 기쁨이 사무치면 울음이 날 만하고, 분노가 사무치면 또한 울음이 날 만하며, 즐거움이 사무쳐도 울음이 날 만하고, 사랑이 사무치면 역시 울음이 날 만하며, 미움이 사무쳐도 울음이 날 만하고, 욕심이 사무치면 또한 울음이 날 만한 것일세. 막히고 억눌린 마음을 풀매 소리쳐 지르는 것보다 더 빠른 방도가 없네.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 우레와도 같아 지극한 감정(情)이 우러나오는 데서 터져 나오고, 터져 나오는 그 소리는 사리에 들어맞으니 웃음과 무엇이 다르리오. 사람이 태어나 이러히 지극한 경지를 겪지 못하고서 칠정을 교묘히 늘어놓곤 슬픔에서 울음이 나온다고 맞춰 놓았으니, 이로써 상을 당하고야 억지로 ‘아이고’하는 따위의 소리를 부르짖지. 그러나 참된 칠정에서 우러나온 지극하고도 진실된 소리란 억누르고 억제하여 저 천지 사이 아무 곳에서나 감히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오. 한나라의 가생(賈生)은 일찍이 그 울 곳을 얻지 못하고, 참다 못해 엉겁결 선실(宣室)을 향하여 한 마디 길게 울부짖었으니, 이 어찌 듣는 사람들이 놀라고 해괴히 여기지 않겠는가.”
한즉, 정 진사는,
“지금 여기 그 울음 터가 저토록 드넓으니, 저 또한 선생을 좇아 한바탕 울어야 마땅하겠으나, 칠정 가운데 어느 감정에 응하여 울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하기에 나는,
“그것은 갓난아이에 물어 보시오. 아이가 처음 날 때 칠정 중 어느 감정에 응하여 우는지를. 갓난아이는 처음으로 해와 달을 보고, 다음으로 자신 앞에 그득한 부모와 친척들을 보고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네. 이러한 기쁨과 즐거움은 다 늙도록 두 번 다시없을 터이니, 슬프고 노여울 리 없이 마땅히 즐거워 웃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도리어 분하고 한스럽게 울부짖기만 하니, 이를 보고, 사람이 태어나 신성한 삶을 살건 평범한 삶을 살건 모든 이는 끝내 죽음에 이르르고 또 살아서는 온갖 근심과 걱정을 겪어야 하기에, 아이는 태어난 것을 후회하여 먼저 울어 스스로에 위문하는 것이라 한다면, 이는 갓난아이의 본래 감정을 깊이 이해치 못하여 하는 말일세. 무릇 아이가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 캄캄하고 막혀있어 웅크리고 지내다가, 갑자기 넓고 훤한 곳에 터져 나와 손과 발을 펴매 그 마음과 생각이 한껏 트이게 되니, 한마디 참된 소리를 외쳐 극에 달한 정을 어찌 풀어내지 않으리오. 그러므로 우리는 응당 저 갓난아이의 꾸밈없는 소리를 본받아, 비로봉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며 한바탕 울어 볼 만하고, 황해도 장연의 금빛 모래사장을 거닐며 한바탕 울어 볼 만할 것이네. 지금 요동 벌판에 임하여 여기부터 산해관까지의 1천 2백 리 사방에 도무지 한 점의 산이라고는 없고, 하늘 끝과 땅의 끝이 맞닿아 아교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하며, 고금에 오가는 비와 구름만이 창창하니, 이 역시 한바탕 울만한 곳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 · ·
강을 건너고 벌판을 지나 어렵사리 연경에 당도한 사절단 일행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는다. 연경에 황제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황제가 머물고 있는 열하까지 조선의 사신들을 초대했다는 것이다. 이에 조선의 사절단은 칠순연에 늦지 않기 위하여 나흘 동안 무박할 정도로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는데, 그것이 일행에겐 고역이었으나 연암에게 있어서는 청의 문명을 탐구하고 스스로를 깨우치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또 선생은 이 열하로의 여정에서 우리네 오천년 문화사에 길이 남을 명문장을 지어 남기기도 한다. <야출고북구기>, <일야구도하기> 등이 바로 그것이다. 연암의 문장을 연구하고 선생의 문집을 처음으로 펴낸 창강 김택영은 이를 조선역사 오천년 이래 제일가는 명문장이라 평하기도 했다. 다음은 그 <일야구도하기> 중의 일부이다.
· · · 나는 오늘에서야 도道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마음을 그윽이 하여 편견을 갖추지 않는 이는 귀와 두 눈이 탈이 되지 않으나, 귀와 눈만을 믿는 이는 보고 듣는 것을 더욱 상세히 살피게 되니 그로써 병폐를 만드는 것이라.
오늘 내 마부 창대가 말굽에 밟혀 뒤따라오는 수레에 실렸으므로, 나는 홀로 말을 타고 고삐를 늦추며 강물로 들었다. 무릎을 굽혀 발을 모으고 안장 위에 앉아 있으니, 한번 잘못 곤두박질치면 그대로 강물행이다. 강을 땅으로 삼고, 강을 옷으로 삼으며, 강을 몸으로 삼고도, 강을 내 본성이라 삼아, 까짓것 한번 떨어지기를 각오했다. 그러자 내 귓속에 강물 소리가 없어지고 무릇 아홉 번 강을 건너는데도 아무런 근심이 없어지니, 마치 안방 안석 위에 앉고 눕고 생활하는 듯했다.
옛날에, 우임금이 강을 건널 적 황룡(黃龍)이 배를 등으로 떠받치는 위험을 당했으나, 마음으로 죽음과 삶의 경계를 밝히고 나니, 그 앞의 용이 용이건 도마뱀이건 크건 작건 문제 되지 아니한 바 있다.
소리와 빛이란 마음 밖의 사물(外物)이니, 그 사물이 항상 사람의 귀와 눈에 탈을 만들어 사람으로 하여금 똑바로 보고 듣지 못하게 한다. 하물며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며 겪는 험하고 위태함은 강물보다도 더 심하니, 보고 듣는 것으로 인하여 돌연 병폐를 만듦이라. 내 장차 연암협 산중으로 돌아가면 다시 그 앞의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이를 증험해 보고, 또 자기만 유익케 하고 자신의 총명함만을 믿는 자에게 이로써 경계하게 하리라.
4개월여 동안의 여정을 마친 선생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자신이 직접 경험한 바를 토대로 북학의 뜻을 더욱 널리 펼치는 동시에, 3년간의 집필과정을 거쳐 <열하일기>를 완성한다. 연경을 다녀오며 뭇 선비들이 써 남긴 연행록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수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열하일기>가 어느 연행록 보다 특별한 것은, 청 황제의 칠순잔치를 통해 국제정세를 읽고 세계의 흐름과 조선의 현실을 명확히 파악하여 조선의 정치적 당론일 뿐이었던 북벌을 비판하고 이용후생을 통한 정덕正德을 실현하는 것이 북학의 요체인 것임을 주창한 것이다.
선생은 연행 이후 청과 서양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고 상업과 무역을 장려하여 조선의 기술과 문명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또한 이와 같은 뜻을 학문적 정치적으로 확립하고자 벗들을 규합하고 문하생을 길러내는 등의 활동을 펼쳐 나갔다. 나아가 여러 관직을 거치며, 벼슬길 위에서도 북학을 백성의 삶에 적용시키고자 힘쓰기도 했다. 그 일례로, 선생이 오래전부터 작성해 오던 농서를 정리한 <과농소초>를 지어 정조대왕에게 올린 바 있으며, 일찍이 청에서 보고 예찬한 벽돌을 직접 연구 및 제작하고 전승함에 차후 수원화성의 축조에 이 공법이 적절히 사용되어 그 기간을 10년에서 2년 반으로 단축하기도 했다.
말년에 중풍을 앓던 선생은 삶을 다하기 직전 한양의 자택에 벗들을 불러 모아 술자리를 가지게 하여 집안을 떠들썩하게 했고, 깨끗이 목욕시키라는 유언만을 남긴 채 숨을 거두었다 한다. 북학파의 영수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오늘날 이북의 개성시 동녘에 위치한 경기도 장단군 송서면 대세현에 뫼셔졌고, 이후 고종조에 여러 차례 추증되었으며 순종조에 문도文度라는 시호를 내려 받으셨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본받아 새로이 창조해 내라 주창한 선생의 뜻은 북학파의 거두들과 함께 힘쓴 이용후생의 뜻과 더불어 실사구시를 주창한 다산 정약용과 입고출신을 주창한 추사 김정희에게 이어졌다. 또한 이 맥은 연암의 손자인 환재 박규수에게 이어지고 대한제국의 개화파에 이어졌다. 그러나 선생의 문집인 연암집은 1900년에 이르러서야 간행되었고, 그 연구 또한 대한제국이 멸한 뒤에야 진행되기 시작했다.
연암은 자기자신이 노론 명문가의 자손임에도 입신양명할 수 있는 출세의 가도를 포기하고, 양반으로서 당대 양반의 잘못된 점을 실랄히 비판하기까지 했으며, 그에 그치지 않고 연령과 계층을 뛰어넘은 우정을 통해 이용후생의 학문을 만백성의 삶에 적용시키고자 힘써 나갔다. 이윽고 명실상부 북학파의 영수가 되어 학우를 규합하고 후학을 길러냈으며, 나아가 관직을 맡으매 그 이상을 실현하였으니, 선생의 위업은 사상과 철학, 천문학, 경세학, 병학, 농학, 사학, 과학, 문학과 예술을 두루 망라하였고 또한 그 남겨진 정신과 문장은 오늘의 우리에 귀감 되는 바가 매우 크다.
우리네 역사의 큰 어른이자 반남박가의 큰 인물인 연암 박지원 선생은 필자의 먼 친척 할아버지 되는 어른이기도 하다. 할배의 학문과 우정에는 경계가 없었고 한계가 없었다.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과 오천년 역사에 다시없을 명문장으로 남기신 사상과 정신은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그 후손으로서 후학으로서 우리는 어떠한 삶을 영위해야 하는가. 연암의 문장에 그 해답이 있으며, 글이란 읽지 않으면 그 넓이를 알 수 없고 쓰지 않으면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니, 지금 연암의 문장을 읽고 스스로의 문장을 쓰라.